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이담 Apr 25. 2021

곧 돌아가실 양반 백내장 수술까지 시켜주냐고 그랬어

13 노인이 노인을 간병했던 시간


오늘은 그간 이야기를 조금 미뤄 왔었던 할아버지 얘기를 좀 더 해보기로 했다. 프롤로그에서도 한 번 언급하긴 했지만 할아버지는 내가 기억하지 못하던 옛날에 한 번, 그리고 내가 대학생 무렵 또 한 번 암에 걸려서 결국 두 번째 암 투병 중에 돌아가셨다. 내가 대학생이던 무렵 할머니는 적지 않은 연세였음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의 간호에 지극정성이셨다. 그 이야기를 좀 더 여쭤보기로 했다. 


할머니: 첫 번째 위암 걸렸을 때는 너희 할아버지가 50대 말쯤이었을 거다. 그러고선 몇 년 S학교를 다니다가 수술을 끝내고 조금 다니다가 조기 은퇴를 했지. 그땐 삼성동에 살았었는데. 위암을 발견했을 땐 초기가 아니라 3기였어. 수술을 해서 위를 반을 잘라내서 장이랑 연결했어. 첫 번째 암에 걸렸을 때도 너희 삼촌이 대학원을 다닐 때라 어떻게 다 가르칠까 걱정하고 그랬어. 의사가 노력하면 살고,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고 그랬어. 그 때 너희 할아버지가 항암 주사를 열두번을 맞았어. 


그래도 할아버지가 그때는 살라고 노력을 했어. 대모산을 같이 거의 매일같이 갔지. 대모산에를 거의 출근을 했어. 산에 다니는 게 운동이 많이 되었나 봐. 회복했을 때 내가 대모산에 가서 고맙다 고맙다 그래 가며 올라갔던 생각이 나. 


할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할아버지가 완치되었다는 판정을 받았을 때 할머니 마음이 얼마나 후련했을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오르는 산은 그전에 지푸라기라도 잡아보고자 올랐던 산과 많이 달랐을 것이다.


할머니: 너희 할아버지가 암 수술하고 조금 살아나서 돈은 없지만 골프를 배우겠다고 그래 가지고 골프장에 다니면서 운동을 했지. 재미를 들려가지고 필드도 나가고 하셨어. 중국도 가고, 일본도 가고. 미국 갔다가 미국에서 골프채를 사 가지고 오는데 골프채를 잊어버려가지고 세관에서 찾질 못해가지고, 그거 배상도 받았던 기억이 나.


사람의 기억은 참 재밌는 것 같다. 살면서 크고 중요한 것만 기억하는 것 같아도 이런 사소한 에피소드들은 꼭 잊지 못하게 마련이다.


할머니: 두 번째 암에 걸렸을 때가 언제였던가. 2011년이었던 것 같아. 처음 암 생겼다가 낫고 다시 재발한 게 15~16년 되지. 두 번째 암에 걸렸다고 했을 때는 너무 놀랬지. 이제는 끝인가 보다 그랬어. 너희 엄마 말이 1년 반 동안 고생하다가 돌아가셨다고 하더라. 그때가 담낭암. 암 걸렸을 때는 (나이가) 76인가 그렇게 됐던 것 같아. 


수술도 안 된다고 하고, 간까지 전이돼가지고. 간이 한 군데만 그랬으면 수술을 하면 되는데 여러 가운데에 퍼져 있었어. 항암 주사를 맞고 하면서 살리려고 애를 썼는데 못 살린 거지. 그때는 S대학병원에 다녔어. 한 1년을 들랑날랑했지. 퇴원하라고 해서 나오면은 한 3일 있다가 또 어려워서 들어가고 그랬지. 


그러다가 분당 병원에서 그러다가 (간호하던) 내가 쓰러진 거야. 그래서 둘이 한 병실에 같이 입원하고 그랬었어. 그래 가지고 조금 나아서 이모하고 엄마하고 삼촌 하고 셋이 교대로 와서 보다가 결국은 또 퇴원하라고 하니까 집으로 못 가고 요양병원에 가서 며칠 있다가 또 병원엘 갔다가 그랬어.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요양 병원에 보내고 마음 아파하던 모습이 생각이 났다. 그때 엄마가 이런 말을 했다. 할아버지 병 수발을 하려면 똥오줌을 받아내야 하는데, 그것은 자식들이 하기 어렵다고. 그걸 할 수 있는 건 할머니뿐인지라 할머니 자신도 노인인데 그 일들을 다 챙기느라 몸이 축났다고 했다. 우리 모두 할아버지를 요양병원에 모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씀드렸지만 할머니는 못내 마음 아파하며 눈물을 보이셨다. 할아버지도 집이 아닌 다른 곳에 있으셔서 그런지 아이처럼 삐진 얼굴도 하고 그러셨던 생각이 난다.


나: 할머니 고생 많이 했네요. 그때는 할머니도 젊지 않았는데.


할머니: 환자 있으면 식구들도 다 고생이여. 돈 없어지는 건 둘째 문제고. 한 2천 몇백만 원 썼을 거다. 그래도 의료보험으로 암은 혜택을 받는다고 해서. 약값 같은 거 싸게 해서 초음파 같은 거는 몇십만 원 씩이거든. 


그러고선 또 백내장 수술까지 하고 돌아가셨어. 할아버지가 눈이 안 보이고 자꾸 답답하다고 해서. 주변 사람들이 곧 돌아가실 양반 왜 백내장 수술까지 시켜주느냐고 그랬어. 그런데 흐릿하다고 답답하다고 그래서 그 아픈 환자가 글쎄 눈 수술해달라고 해서. 그래도 비용이 싸대. 그게 20~30만 원 정도밖에 안 하더라고. 눈 수술을 하면 안약을 두 시간에 한 번씩 넣어야 하나. 그렇게 뒤치다꺼리를 하고 그랬는데 수술하고 한 달쯤 있다가 돌아가셨어. 


웃으면 안 되는데 웃음이 난다. 할아버지가 끝까지 밝은 세상을 보고 싶으셨구나. 그리고 한 달 후 그 밝은 세상을 뒤로하고 돌아가시는 뒷모습이랄까. 그런 게 참 경쾌하게 느껴졌다.


나: 돌아가시기 전까지 정신이 멀쩡 하셨나 보네요.


할머니: 그럼~정신 멀쩡 하셨지. 배짝 말라가지고. 원래도 말른 양반이 더 말랐지. 


나: 할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두 분이 얘기 많이 하셨어요?


할머니: 당시에는 아파하는 사람이랑 얘기하기도 그렇고 해서 대화도 별로 안 하고 그랬는데. 지금은 후회 난다. 옛날 얘기도 하고 그랬어야 했는데. 아픈 사람 고쳐줄라고만 애쓰고. 잘 잡숫게 하려고 애쓰고. 


한 번은 내가 집에 뭘 가지러 갔는데. 버스 안에서 전화가 왔는데 난리 났다고 하더라고. 깜짝 놀래 가지고. 할아버지가 나 없이 화장실에 간다고 갔는데 할아버지가 변기까지 못 가고 바지에 대변을 전부 본거야. 일어나서 걸을 수 있을 때였나 봐. 겉 옷 속 옷 할 거 없이 전부. 버스에서 내려서 택시를 타고 갔더니 내가 올 때까지 서서 기다리고 있더라고.


할아버지의 난감한 얼굴이 떠오른다. 그리고 이런 일들은 정말 다른 사람이 대신해 줄 수가 없는 일이고, 오직 배우자만이 해줄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최근에 어떤 TV 프로그램에서 암환자들을 돌보는 의사 이야기가 나와서 그 사람의 책을 읽어보았다. 그 책에서 외국의 경우 살 날이 적어도 몇 개월은 남았을 때 치료를 중단하고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조용히 인생을 정리할 수 있게끔 해준다고 했다. 그에 반해 우리나라는 마지막까지도 치료에 집중하는 식으로 사람들의 인식이나 의료 시스템이 만들어져 있어서 실제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들이 인생을 잘 정리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아마 할머니 할아버지도 그러지 않으셨을까 싶다. 일 년이 조금 넘는 시간이 우리 가족에게 주어졌지만 할머니는 할아버지 죽음 이후 오랫동안 슬퍼하셨다.


할머니: 오늘은 그만 허자. 나 많이 졸리다.


전화를 끊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어쩐지 쓸쓸하게 들렸다.


Photo by Daan Stevens on Unsplash

이전 12화 그렇게 마음이 상쾌하고 기분이 좋을 수가 없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