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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이담 May 03. 2021

꽃이 진다. 아름답게

15 나이 먹는다는 것


오늘은 벌써 할머니와의 마지막 인터뷰다. 마지막이니만큼 지금 할머니의 목소리를 가장 잘 담았던 인터뷰를 적어 보기로 한다. 80이 넘은 노인이 된 나의 할머니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을까? 


신기하게도 내 기억 속 할머니는 60대 정도의 노인이다. 그래서 가끔 할머니를 보면서 하얗게 센 머리와 점점 거동이 불편해지는 모습에 놀라곤 한다. 


'와.. 우리 할머니도 이제 노인이구나.' 


당연하지만 놀라운 발견이다.


할머니: 내가 70대에 어떤 사람이 나한테 85세 이상 못 산다고 그랬거든. 근데 벌써 84세다. 2월 다 가고 벌써 3월 들어온다.


나: 아니 그런 명줄이 마음대로 되나요? 그냥 주신대로 사는 거지.


할머니: 내 딴에는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려고 애를 쓰는데 그게 마음대로 안 된다. 노력하는 중이야. 될 수 있는 대로 좋은 모습만 보이려고. 저 할머니가 이런 일도 했다고, 저런 일도 했다고 사람들이 기억해줄 수 있게끔 그렇게 최선을 다해서 노력을 할 때가 있어. 


나: 좋은 모습만 보이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할머니: 내가 너한테 좋은 할머니였냐?


나: 에이 그게 무슨 질문이에요. 당연히 좋은 할머니였죠. 


할머니가 이런 말씀을 하시니 마음이 조금 슬퍼진다. 좋은 인상을 남기려고 애쓴다. 내가 당신에게 어떤 사람이었냐를 생각하는 것은 인생의 마지막 꽃을 고이 접는 듯한 마음일까나.


'사람 잘 변하지 않아.'라고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그런데 80이 넘은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많이 변했다. 예전에는 꽤나 직설적이어서 주변 사람들 마음이 상하는 일도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할머니가 전화를 끊고 본인이 생각하기에 상대방이 서운했을 일이 생각나면 조금 후에 다시 전화를 하신다.


"아까 내가 이렇게 말해서 서운했냐?"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려 애쓴다.'는 말이 이런 의미였을까? 할머니의 노년기 모습에서 난 참 배울 점이 많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이렇게 마지막 페이지를 아름답게 꾸며보고자 애쓰는 할머니의 마음이 짠하기도 하다. 그래서 말을 휙 돌려본다.


나: 맞다. 할머니 봉사도 하고 그랬잖아요.


할머니: 그래. 좋은 일도 내가 하고 싶다고 하는 게 아냐. 하나님이 도와주고 싶은 사람들을 여러 가지 기회를 통해 만나게 하셔. 내가 바쁠 때도 교회 다니면서 봉사를 할 기회가 있었어. 수요일마다 어려운 사람들 국수 삶아서 주고 그런 것. 그때는 걸인들이 인천에서도 오고 신도림에서도 오고 그랬어. 그 사람들 지하철 타고 다니매 여기저기서 밥 얻어먹고 그랬나 봐. 지하철은 공짜니까.


할머니와 딱 한 번 노숙자들에게 식사를 무료로 나눠주는 곳에 갔었다. 나름 봉사랍시고 기대를 많이 하고 갔는데 어린 내게는 그 사람들의 퀴퀴하고 오물이 뒤덮힌 듯한 냄새가 너무 충격적이었다. 섣불리 다가가서 식사를 나눠주거나 담소를 나누지 못하고 그냥 할머니 치마를 붙잡고 쭈뼛거렸던 기억이 난다


변명을 하나 덧붙이자면 내가 향에 민감한 건 다 할머니 때문이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할머니에게서는 노인의 퀴퀴한 냄새가 아닌 늘 좋은 냄새가 났다. 할머니는 늘 내가 아는 가장 고급 브랜드의 로션이나 향수를 쓰시곤 했는데, 그게 할머니의 낙이었다. 집안도 늘 깔끔하고 깨끗하게 청소하셨으니 내가 냄새에 민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도 누가 싸구려 향수를 쓰면 바로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고 구역질이 난다. 좀 둔하게 키워주시지.



할머니: 나도 다음 달에 백신을 맞을 거 같어.


할머니가 화제를 돌렸다.


나: 할머니, 백신이 할머니 나이 때에는 조금 위험하지 않아요?


할머니: 그래도 나라에서 맞으라니 맞아야지. 뭐 죽으면 좋은 거고!


나: 허허허, 할머니 오래 사시겠네 그리 말씀하시는 거 보니.


할머니의 죽으면 죽으리이다 식의 말을 들으니 오히려 안심이 됐다. 우리 할머니 참 건강하시구나 이런 생각이 들어서. 그리고 한편으론 존경스러웠다. 어떤 인생을 살면 저렇게 당당하고 행복하게 죽음을 맞을 수 있을까?


할머니의 꽃은 지고 있다. 처연하지만은 않다. 오히려 참 당당하고 선명하게 붉다.


Photo by Michael Dziedzic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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