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3.
P는 말 없는 아이였다.
P는 드넓은 바다가 내다보이는
해안가 끄트머리에 솟은
작은 이층집에서 살았다.
맞은편 언덕에는 P의 할아버지 Q가
관리하는 빨간 등대가 서 있었다.
Q는 하루도 빠짐없이 이곳을 지키는
등대지기였다. 빛바랜 자전거를 타고
방파제를 지나 10여분 뒤 이르는
일터를 그는 여전히 사랑했다.
궂은 날씨에는 더 큰 사명감으로
등대를 지켰다. 그에게 등대는
쇠락한 어촌의 삶을 버티는
신념이었다.
그가 P를 맡아서 키운 지 벌써 5년이 다 되었다.
그의 아들은 대책 없는 술주정뱅이였다.
가정 폭력에 시달리던 며느리는
끝내 집을 떠났고 아들은
고주망태가 되어
새벽일에 나섰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작년까지는 아내가 있어서
좀 수월했지만 이제 혼자인 Q는
사실 두려웠다. 무뚝뚝하고 말수도 없는
자기를 너무도 닮은 P를 어떻게 하면
잘 키울까 고민했다.
평생 바닷바람에 물든 거친 살결 속으로
파고든 작은 생명, 딱딱한 주름 속
여린 감성까지 그대로 닮은 손주.
Q의 걱정과 달리 P는 잘 자랐다.
주변에서도 작은 보살핌을 보탰다.
P는 동네의 거의 유일한 꼬마였다.
Q는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도
바로 쉬지 않았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조금씩 글을 썼다.
대단한 건 아니고 일기나 수필 따위였다.
가끔 시를 닮은 무언가를 끼적이기도 했다.
작은 생각과 사소한 감정, 조그만 느낌이 담긴
그런 크고 작은 노트가 벌써 20권이 되었다.
언제부턴가 P도 할아버지를 따라
이런저런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아직 학교에 갈 나이는 아니었지만
제법 글 쓰는 습관이 든 것 같았다.
P는 오전에 글을 쓰고
오후에는 바닷가에서 놀았다.
P의 친구는 책과 바다,
그리고 할아버지였다.
P는 바다가 좋았다.
날이 맑고 바람이 잦아든
오후의 해안을 좋아했다.
등대 반대편 집 너머에는
모래사장이 있었다.
햇살을 닮은 빛으로
길게 늘어져 반짝이는 공터는
P의 놀이터였다.
모래성을 쌓고 조개껍질을 줍고
바닥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날은 할아버지가 오랜만에 쉬었다.
두 사람은 해안을 걸었다.
앞서 가던 P는 무언가를 보고 뛰어갔다.
"할아버지, 여기 뭐가 있어요."
P의 손에는 둘둘 말린 종이가 담긴
유리병이 있었다. 입구는 코르크 마개와
접착제, 테이프로 막혀 있었다.
"이게 뭘까?"
"할아버지가 열어봐요."
두 사람은 보물을 주운 듯 신이 났다.
해안에 밀려온 것, 어쩌면 그건
그들에게 새로운 희망일 수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