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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다움 Jan 09. 2024

나는  이 운동을 하고 난 직후엔 몸무게가 늘어났다.

수영 :  두번이나 시도했지만, 세번째 강습은 안받기로 결심한 운동

  몸치인 나에게 적합한 평생운동을 찾기 위해 시도가 많은 만큼 포기도 빠르고, 재시도하는 일은 드물다. 유일하게 이 운동만은 내가 꼭 정복하리라,라는 마음으로 진지하게 재강습을 받은 운동이 바로 수영이다. 살면서 운동을 잘하고 싶은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수영만은 예외였다. 거창하게,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의 여건상 생존과 직결된 운동이라는 점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될 듯 말 듯 안 되는 감질맛(?) 나는 매력이 있는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처음 수영을 배우게 된 계기는 7살 때였다. 남동생이 수영장에 도착하자마자 용감하게 풀에 뛰어들 물을 잔뜩 먹고 안전요원에게 구조된 것을 본 이후로 수영이란 걸 반드시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두려움과 설렘을 안고 수영을 처음 배운 것은 초등학교 3학년때였다. 발차기부터 시작해서 호흡, 팔 동작 등 하나씩 배울 때는 곧장 잘 따라 했다. 하지만 언제나 금세 등장하는 위기, 이 모든 것을 합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팔을 휘져으며 발도 차고 호흡까지 하는 순간 내 몸은 수면이 아닌 바닥을 향해 가고 있었다. 제일 큰 문제점은 호흡을 하기 위해 입을 벌리면 산소 대신 물이 유입되었고, 입과 코로 들어오는 수영장 물에 배는 부르고(?) 코는 따가워져 정신이 혼미해지곤 했다.

   그렇게 수영은 나와 잘 안 맞는 운동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중단했다. 그러다가 20대 중반, 회사 사람들이 근처에 있는 수영장 수질 괜찮다고 추천하는 말을 들었다. 안 그래도 뭔가 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만 하던 차에, 수질이 좋은 수영장이니 물 좀 먹어도 괜찮겠지(?)라는 긍정적인 생각을 앞세워 수영에 다시 도전했다. 그래도 초등학교 3학년 때 배운 수영을 몸 기억하고 있었는지 처음엔 어렵지 않게 동작을 따라 할 수 있었다. 심지어 머리를 물속에 넣고 수영장 킥판을 잡고 발차기를 할 때만 해도 선생님이 초보반 에이스라고 칭찬과 격려도 아끼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나의 위기구간 역시 내 몸에 새겨져 있었다. 머리를 들어 호흡을 하는 순간 수영장 물은 거침없이 내 입으로 들어왔고, 몇 번 참고 가보기도 했지만 계속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정적으로 수영을 또 한 번 그만둔 이유는 수영을 하고 나서 몸무게를 쟀는데 몸무게가 미세하게 늘어난 것을 목격한 날이었다. 물론 실제로 몸무게가 늘어날 만큼 수영장 물을 흡입하지는 않았겠지만, 호흡이 잘 안돼서 머리는 아프고, 입과 코로 물을 잔뜩 먹은 탓에 수영장 소독약이 내 몸을 가득 채운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까지 받았는데, 운동 직후 몸무게가 늘어난 것이 마치 내가 수영장 물을 다 마셔서 그런 듯한 자괴감까지 들었다. 그 이후로 누가 수영을 할 줄 아냐고 물어보면, 이렇게 답다. "수영을 배운긴 했지만, 수영은 못합니다."

   물가에 안 가면 되지, 가더라도 구명조끼를 입으면 되지 등의 논리를 내세우고 수영 무용론을 주장하며, 다시는 수영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다. 사실 아직도 '수영'하면 남동생이 처음 수영장에 가서 숨을 꼴깍거리면서 허우적대던 날이 저절로 떠오른다. 그래서 수영만 하면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가서 물에 안 뜨고, 그 와중에 숨을 쉬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입을 벌려  오히려 물을 먹는 문제가 발생한다.


  동시에 수영을 완전히 포기한 나 대신 내 아이들은 수영을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제대로 배워서 물을 무서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요즘엔 아이들이 수영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 부여한 '수영포기자'라는 낙인이  조금 옅어지긴 했다. 처음엔 물에 발을 담그는 것도 꺼려하던 아이들이 선생님이 던져주는 장난감을 회수하러 물속으로 거침없이 잠수하는 것을 볼 때, 수영도 계속하다 보면 조금씩 나아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물론 1달 전과 비교해서는 그다지 큰 차이점이 없어 보이지만, 수영을 시작하기 전인 1년 전과 비교하면 상당히 물과 친해진 아이들이었다.

<아들이 선생님과 수영을 즐겁게 배우는것을 보며 수영 재수강 욕구가 잠시 올라왔다. 하하>


  10대와 20대에 각각 도전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던 수영. 30대 마지막은 아이들과 함께 다시 수영강습을 받을까 살짝 고민하다가 그만두었다.(한국말로도 못 배운 수영을 영어로 배우는 것은 무리라는 판단이었다) 대신 수영에 대한 정의와 목표를 수정하였다. 그 계기는 다음과 같다.

  아이들 수영강습이 끝나길 기다리다가 심심해서 수영장에서 비치된 누들(물에 뜨는 기다란 스펀지)을 허리에 끼고 물을 먹지 않기 위해 머리는 꼿꼿이 든 채 '개헤엄'을 치고 있었다. 그때 안면이 있던 미국인 할머니가 나보고 수영 잘한다고, 말하셨다. 살면서 수영을 할 줄 안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데, 내가 하고 있는 게 수영이라니. 그러고 보니 또 이게 수영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비록 자유형, 접형 등과 같이 대다수가 알고 있는 영법 중 하나로 분류하긴 어렵지만, 물속에서 팔다리를 휘적거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 확실하다. 게다가 기다란 스펀지가 감싼 내 몸은 물에 떠있었고, 머리는 안전하게(?) 들어서 절대 물이 입으로 들어가지 않기에 편안하게 물속을 휘젓고 다닐 수 있었다.

맥주병 같은 나를 물에 띄워주는 고마운 누들(막대형 스펀지)

   

  그렇게 수영을 '물속에 있으나 물을 먹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정의'내리고, 도구 없이 맨몸으로 4가지 영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물 안에서 편안하게 전진할 수 있는 수준'으로

'목표'를 설정하니, 비로소 나는 수영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제야 물에 대한 공포를 조금은 내려놓고, 수영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누가 수영할 줄 아냐고 물어보면 난 이렇게 말한다, "수영을 배우긴 했는데, 못합니다. 단, 도구가 있으면 가라앉지 않고 앞으로 나가긴 합니다."라고. 수영을 '한다'와 '못한다' 둘 중하나를 선택하라면, 난 수영을 못하는 사람이이다. 하지만 양자택일이 이닌라, 그 둘 사이 어딘가로도 설명할 수도 있다. 간단하게 둘 중 하나로 불친절하게 나누기 보다, 장황하지만 나에게 더 다정한 방법으로 설명하기로 한다. "난 보조도구가 있으면 물에 뜨며, 수영 영법은 구사하지 못하지만 앞으로는 나가는 사람이다."라고.


덧.

  스펀지 막대기인 누들에 기대어 배형을 하다 보면 수영장 천장에 시선이 꽂힌다. 시야가 앞을 향하는 게 아니기에 제자리에서 발장구만 치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때, 문득 천장에 구조물들을 한 칸, 두 칸 세어보니 내가 앞으로 나가는 것을 느낀다.  

  새해 결심이 흐려지기 딱 좋은 요즘, 여전히 오래된 감정과 습관에서 허우적대며 내가 앞으로 나가고 있는지 의심이 들 때, 난 수영장에 간다. 몸에 힘을 뺀 채 누워서 발차기를 첨벙첨벙하다 보면 그 길었던 수영장 끝에 도달해 있는 나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멈추지 않고 계속 간다면 언젠가 내가 원하는 곳에  닿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수영장에서 발견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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