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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시감 Oct 05. 2023

내 아들 아니고 엄마 아들!

가족이라서 더 옹졸해지는

6년 전쯤 엄마가 큰 교통사고를 당하셨다. 파란불에 횡단보도 중간쯤 건너가고 있을 때 신호위반을 한 자동차에 치이셨다. 운전자는 중학교 선생님이었는데, 늦잠을 자서 출근시간에 지각할까봐 급하게 서두르다 빨간불인 걸 미처 못 봤다고 했다. 어떻게 횡단보도에 있는 사람을 못 볼 수 있냐고, 제정신이냐고 가해자를 향해 분노와 울분을 쏟아냈지만, 일어난 일을 되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허리와 왼쪽 다리를 심하게 다친 엄마는 일산에 있는 대학병원에서 부러진 곳들을 철심으로 고정하는 수술을 받으셔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엄마가 당시 배낭을 메고 있었는데, 자동차에 치여 바닥으로 떨어졌을 때 그 배낭이 완충제 역할을 해 부상이 덜했다는 것이다. 그 배낭이 아니었으면 목숨까지 위태로운 상태가 될 수도 있었다고 하니, 다시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엄마가 예쁜 숄더백이 아닌 투박한 배낭을 메고 다니실 때, 촌스럽게 왜 배낭을 메고 다니시냐며 타박한 적이 있는데 괜한 말을 한 것 같아 반성했다. 이후 길거리에서 배낭을 메고 다니시는 어르신들을 보면 왠지 모르게 짠하다. 그리고 어르신들이 혹시라도 갑자기 넘어지는 사고가 일어나면 그 배낭이 엄마의 경우처럼 완중체 역할을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대학병원에서 수술 후 한 달, 그리고 동네 작은 정형외과로 옮겨 2개월, 또 한방병원에서 1달간의 재활과 요양을 거쳐 겨우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엄마는 그새 많이 늙어 있었다. 칠십이 넘는 나이에도 육십대로 보일 만큼 젊어 보였던 엄마였는데, 이젠 누가 봐도 할머니 같았다. 


힘든 일을 겪고 나면 철이 든다고 했던가. 엄마의 교통사고 이후 나는 거짓말 조금 보태 효녀로 거듭났다. 언제까지나 내 곁에 계실 거라 생각했던 엄마가 언제 돌아가실지 모른다는 각성을 했기 때문이다. 우선 나는 엄마가 혼자 계신 김포집을 자주 갔다. ‘아쉽거나 필요할 때만 부모를 찾는 게 자식의 간사한 본능’이라는 말도 있는데, 그 동안은 나도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서울과 김포간 거리가 1시간도 안 될 만큼 가깝건만 사느라 바빴다는 건 핑계이고, 그냥 귀찮고 노느라 바빴던 것 같다. 그 전에는 김포집을 두 달에 한 번 갈까말까 했는데, 이제는 잡지 마감으로 출근을 하거나 중요한 약속이 아니면 주말마다 간다. 


김포집에 가면 일요일 나의 루틴은 엄마와 교회에서 예배 후 점심 외식과 장보기 그리고 청소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엄마는 언제나 오빠와 나에게 교회에 다니라고 잔소리를 하셨지만 우리 둘은 귓등으로 흘려 들었다. 그러면 한탄하듯 “으이구, 내 평생 죄는 너희 둘을 구원 못 시킨 거다!”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하지만 엄마의 교통사고는 없던 신앙심까지 생기게 했다. 엄마가 더 크게 다치지 않은 건 하느님께서 지켜 주신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수술실에 들어가셨을 때에는 하느님께 엄마를 지켜달라고 간절히 빌었다. 사람은 어려움 속에서 신처럼 의지할 곳을 찾기 마련이다(2022년 말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3년 여에 걸친 코로나 기간에도 가족과 친구의 상실, 대량 실직 등을 겪은 Z세대들이 종교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고 한다). 


어느 일요일, 엄마와 함께 어김없이 일요일 루틴에 따라 교회에서 예배 후 설렁탕집에서 점심을 먹을 때였다. 엄마가 약간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아참 다음 주말에 오빠 집에 온대!” 

“중국에서 들어왔어?” 

“아니, 다음주 목요일에 들어온대. 그래서 토요일에 집에 오겠대. 이따 장 볼 때 사골뼈 좀 사가자!” 

“집에서 사골 고아 드시게?” 

“아니 오빠 오면 좀 먹이게! 중국에서 일하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겠니…”  


엄마의 마지막 말을 듣는 순간 뭔지 모르게 점차 심사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이라고 묻고 싶었다. 매주 집에 와서 교회 같이 가고, 장보고 청소하는 건 난데… 나도 직장 다니며 고생하는데… 게다가 매주 내 돈으로 장까지 보는데…   


나는 멀뚱히 몇 초간 엄마를 쳐다보고는 대답 없이 밥을 먹었다. 내가 뾰로통한 걸 감지한 엄마는 내 눈치를 보며 말했다. 


“사골뼈는 엄마 카드로 살까?” 

“엄마 카드 안 갖고 왔잖아!” 

“아 그러네…” 


나는 속으로 “난 몰라! 내 아들 아니고 엄마 아들이니까 엄마 카드로 사!”라고 어깃장을 놓았다. 매주 장보는 것도 10만원이 넘는데… 몇 만원이면 모를까 사골뼈면 못해도 10만원이 넘을 텐데… 나도 아닌 오빠 먹이자고 내가 돈까지 써야 하는 건가… 옹졸한 맘과 함께 머릿속에서 계산기가 두드려졌다.   

보통 부모님이 아프시거나 돌봐야 하는 상황에서 결혼한 자식보다 결혼 안 한 자식의 몫이 커진다. 아마 결혼 안 한 싱글들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아무래도 결혼해서 아이 키우며 가정을 돌봐야 하는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시간이 많기 때문이다. 나는 오십에도 결혼을 안 한 싱글이고, 일찌감치 결혼한 오빠는 일 때문에 중국까지 왔다갔다 하는 상황이라 김포집에는 어쩌다 한 번씩 왔다. 오빠의 상황을 이해 못하는 게 아니라서 그 동안은 억울한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엄마니까 내가 보살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오빠가 명절에 잠깐 와서 일도 제대로 안 하고 용돈만 챙겨드리는데 사랑받는 얄미운 며느리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정작 궂은 일은 다 하지만 시어머니께 제대로 대접을 못 받는 큰 며느리 같았다. 왜 결혼도 안 했는데, 그런 억울한 생각이 들었는지...하하. 


그래서 사골뼈는 어떻게 했냐고? 내 카드로 산 뒤 엄마한테 현금으로 받았다. 하하. 그래도 친오빠가 먹는 건데 좀 치사한 거 아니냐고?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내가 돈까지 내고 꽁한 마음으로 엄마한테 계속 옹졸하게 구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엄마가 오빠 오면 준다고 정성스럽게 곤 사골국을 나도 야무지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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