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몽키거 Apr 12. 2024

돌아온 순례자 아내를 맞이하는 남편의 태도

2023년 10월 13일 이탈리아에 돌아왔다

이탈리아야, 내가 돌아왔다
공항에 도착하니 조금 실감이 난다


 드디어 이탈리아, 우리 신랑(aka 내 짝꿍, 남이 편이 아닌 내편)이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늘 반가운 신랑. 보자마자 내 커다란 배낭을 짊어지며 잘 왔다고, 보고 싶었다고 힘껏 안아주는 그 느낌이 늘 든든하다. 그래, 내가 돌아왔구나. 이탈리의 내 집으로 돌아왔구나. 한국은 아니어도 내 신랑이 있는 곳이 곧 내 집이지. 마음이 안정이 된다.


 우리는 거진 매일이 멀다 하고 통화를 하는 사이이기에 딱히 산티아고는 어땠고 런던은 어땠냐는 등의 물음은 필요 없었던 것 같다. 마치 붙어 있는 것같이 하루하루 나의 일상과 업다운을 다 공유했기에 아마 신랑도 나와 같이 걷는 듯한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나는 만약에 신랑이 산티아고를 갔다 왔다고 한다면 매일매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다리가 어떻게 아픈지, 뭘 먹고 뭘 봤는지, 숙소가 어땠는지 등 이런 디테일이 굉장히 궁금할 것 같은데 우리 신랑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안전했는지, 무리하지는 않았는지, 어려움은 없었는가 딱 이 정도였다. 내가 안전하고 즐겁게 잘 다녀왔다고 말해주는 것, 지금 이탈리아의 신랑 품에 출발했던 그 모습 그대로 잘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 신랑은 안심한 표정으로 이것저것 말하는 내 모습을 그냥 웃으며 바라본다.


단 하나의 조건

내가 남편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허락받을 수 있었던 것도 몸과 안전에 문제가 생긴다면 다 접고 신랑이 와서 데려가는 걸 승낙한다는 조건을 받아들인 이후였다.


언제든지 멈춰야 할 때 고민하지 마라.
그곳이 시골이든 어디든 내가 데리러 가겠다.
너의 안전이 이상이 생겨 내가 데리러 가면 두말없이 바로 따라 돌아오는 거다.


 남편은 나의 모든 도전과 열정을 응원하지만 단 하나, 그게 내 건강과 안전을 위협하거나 그럴 신호가 보일 때 무시하고 걷는 바보 같은 행동은 용납 못한다를 확고히 했었다. 그리고 31일에 걸친 산티아고 순례길과 일주일 런던에서의 여행 일정을 매일 공유하며 정말 즐거운 추억을 잔뜩 안고 왔다.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의 악명 높은 소매치기들, 파리의 여행 캐리어를 낚아채 달아나기도 하는 히피들, 인도에서의 부랑자들, 늦은 밤 뉴욕의 거리 등 승무원을 하면서 다양한 나라를 여행하며 특별히 안전을 신경 써야 하는 무수한 나라를 거쳐 달련된 나를 왜 이리 못 미더워하는가 싶으면서도 늘 우리 부모님보다 더 세세하게 챙겨주는 모습이 사뭇 든든하고 고맙기도 했다. 나는 여행이나 산티아고와 같은 여정 등에 혹시 필요한데 빠진 준비물이 있을까를 고민하는데 신랑은 혹시나 안전사항에서 각별히 주의할 게 있지 않을까를 고민하는 게 이거 가만히 생각하면 결혼 참 잘한 것 같단 말이야. 서로가 보는 시선이 다르기 때문에 잊지 않게 상기시켜 주고, 각자의 장점 단점을 나누며 묘하게 상호보안이 된다.

 여하튼 안전제일주의 남편과 약속한 대로 31일의 산티아고 순례길과 일주일간을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안전하게 잘 돌아왔다.   


이제 안 하면 아쉬울 듯한 우리 신랑만의 세리머니

 내가 일 년에 한두 번 한국을 간다던가 다른 곳을 혼자 여행할 때도 늘 나를 픽업하러 공항에 오는 날에는 집을 깨끗이 청소하고 꽃을 사두고 때론 풍선으로 거실을 꾸며놓는 신랑의 “웰컴홈” 세리머니는 내 남자친구였을 때부터 남편이 된 지금까지 12년 간 변함이 없다. 조심스럽게 말하지만 난 이런 서프라이즈가 그리 반가운 사람은 아니다. 약간 닭살 돋는다고 할까? 준비한 사람의 정성을 생각해서 나도 “어머나~”하며 좋아하고 놀랍다는 리액션을 해줘야 하는 것도 부담스럽고, 이틀이면 시들을 비싼 꽃이 좀 아깝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사랑을 표현하는 언어와 방식이 신랑의 그것과 다르니 이런 부분은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로 한지도 오래되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식탁에 꽃과 케이크 그리고 카드와 선물이 있었다.


779


케이크 위에 올려진 초를 보니 이제야 이해가 간다.

내가 산티아고를 끝내고 런던에 있을 때 즈음 신랑이 내가 발급받은 산티아고 완주 증명서에 정확히 몇 킬로로 명시가 되어있냐고 물어서 대답해 준 적이 있다. 보통 산티아고는 800km라고 하지만 다시 정확히 계산을 해서 공식적으로 779km라 하고 실제로 순례길 완주를 하고 거리가 적힌 증명서를 발급받으면 779km라고 적혀있다. 이걸 남편이 내가 도착할 때 케이크 위에 맞는 초를 올려놓고 싶어서 진작에 넌지시 물어봤던 거. 이렇게 가끔 세심한 나보다 더 세심한 남편의 모습을 볼 때면 귀여울 때가 있다. 내가 도착하기 전에 꽃도 사고 케이크도 사고 여기저기 다니며 바쁘게 보냈을 신랑을 생각하니 참 고마웠다.


너의 큰 도전이었던 산티아고 순례길을 위한 내 작은 정성이야
너의 인생의 모든 걸음이 좋은 걸음이길 바라
- 사랑을 담아 남편이


 이탈리아어를 해석하니 이상하긴 한데 카드에는 나름 산티아고 순례길의 ‘걸음’ 이란 단어를 이용해 로맨틱한 글이 적혀있었다. 그리고 포장되어 있던 작은 선물을 열어보니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 책이었다. 순례길을 걷기 전에 이북으로 한번 읽고 갔는데 이번에는 이탈리아어 책이다.

 ”이제 순례자가 되어 돌아왔으니 이탈리아어로 한 번 읽는 것도 의미 있을 것 같아.“

 아직은 부족한 이탈리아어 수준이지만 남편의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언젠가는 이탈리아어로 된 이 순례자를 꼭 읽어보리라 다짐해본다.


파울로 코엘류의 순례자 이탈리아 버젼

 

 신랑이 불붙여준 초를 힘껏 불고, 함께 케이크를 나눠먹으니 공식적으로 나의 산티아고 순례길 여정의 막을 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멀리 갔다가도 결국은 남편이 있는 내 집으로 돌아왔구나. 유부녀로 다녀온 산티아고는 돌아올 때 느낌이 남들과 많이 다른 것 같다. 오래된 외국 생활을 하면서도 나의 집은 늘 부모님이 계신 한국이었는데 이런 큰 모험을 하고 돌아오는 곳이 또 외국, 그리고 내 부모님이 아닌 남편이 나를 맞아주는 기분이 묘하다. 뭔가 이런 인생의 큰 여정을 이뤄내고는 부모님이 계신 곳으로 돌아가는 게 맞는 느낌? 외국인과 결혼해서 외국에서 사는 유부녀로서만 느끼는 이 묘한 귀화본능이 잃어버린 감각을 기억하라는 듯이 툭하고 어디선가 움직인다. 우리 엄마한테 달려가서 미주알고주알 한참을 털어놓아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고맙다 짝꿍아
오늘의 저녁은 내가 좋아하는 일식당에서 먹었다

 

 남편이 오늘 저녁은 내가 좋아하는 일식당에 가서 저녁식사를 하자고 한다. 미리 예약을 해놓았다고 좋아하는 음식 먹고 푹 잘 쉬기만 하라는 참 친절한 사람이다. 나에게는 대단한 모험이었지만 뭐 특별히 배려를 받고 칭송받아야 할 큰 일을 하러 갔다 온 사람도 아닌데 대단한 듯 나를 대해주는 신랑이 고마웠다. 연어니 라멘이니 좋아하는 음식을 먹으며 소소하게 산티아고 이야기를 풀어보다 보니 내가 이탈리아로 돌아온 날이 저물어간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다고 나란 사람이 크게 변한 것 같지는 않지만 분명 내 몸을 곧게 세워주는 몸 안의 커다란 단단한 근육이 하나 생긴 것 같은 여정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참 행운이었다고 생각하는 점은 나의 결정을 지지하고 응원해 주는 남편이 있었다는 거. 내가 찾고자 하는 의미를 더도 덜도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함께 그 의미의 무게를 이해하려고 하는 선한 사람이었다는 거. 그런 면에서 순례자 남편으로서의 자세에 대해서 난 그에게 100점을 주겠다. 내가 순례길을 결정하고 준비하고 떠났다가 돌아오는 모든 과정에서 남편에게 느낄 수 있는 조금의 아쉬움이나 서운함을 느낄 틈도 없이 정말 여러 면에서 나의 모험이 자랑스럽고 도움 될 수 있게 남편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줬다.


 그래서 말인데… 신랑이 이렇게 잘해주는 걸 보니까 말이야…

 나 한번 더 가도 될 것 같은데?

 그렇지?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큰 거 두 개 확인했다.

 내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데 체력적 문제가 없다는 점

 내 남편이 산티아고 순례길 뒷바라지를 잘한다는 점


 혹시 알까. 내가 산티아고 두 번째 이야기로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그날까지 우리 모두 각자의 인생에서 부엔 까미노!

 우리 남편이 카드에 적은 것처럼 인생의 모든 걸음이 행복하길!

이전 14화 런던에서 드디어 뮤지컬 프로즌을 보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