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조수석에 앉아서 매번 가던 길도 (방향에 약한 내겐) 처음으로 그 길을 운전해서 가려면 놀라울 정도로 낯설다. 반대로 내가 직접 운전해서 갈 때 비로소 그 길이 어떤 곳인지 알게 된다.
낯선 곳으로 여행을 가도 그렇다. 누군가가 인솔해 주는 곳은 다녀와도 어딜 다녀왔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때의 경험까지 기억나지 않는 건 아니다. 지금까지 좋았지만 안타깝게 기억 못 하는 곳의 일 순위는 스페인 바르셀로나 근교의 작은 마을들이다. 하나는 중세 도시였고, 하나는 수도원이 있는 곳이었다. 이미 공간적으로 현대로부터 시간을 분리한 마을이었는데, 우연찮게 축제 기간까지 겹쳐 중세 복장의 사람들이 차 없는 마을을 걸어 다니며 밤에 폭죽이 터질 땐 동화 속 한 장면 같았다. 수도원이 있던 곳은 저녁 시간이 되어 굳게 잠긴 문 앞의 광장 분위기가 이상하게 아직 남아있다. 너무 오래되어 언젠가 꿨던 꿈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안타깝지만, 여기에 멕시코 산 크리스토발 데 라스 까사스 지역의 워크캠프 첫날 풍경도 덧붙여야 한다.
이 지역은 해발 2,110m에 위치하여, 해가 없는 새벽이나 저녁엔 쌀쌀했다. 첫날 호스텔에서 배정받은 천장이 높은 방은 새벽녘엔 꽤 추웠다. 게다가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하는 닭들이 어찌나 우렁차게 울어대는지 일찌감치 잠이 깼다. 짐을 싸고 택시를 불러서 기본요금 거리에 있는 워크캠프가 열리는 건물로 이동을 했다. 겉모습만 봐선 제대로 찾아온 게 맞나 잠시 갸웃거렸지만, 입구부터 커다란 배낭들이 가득 놓여있는 걸로 보아 제대로 온 게 맞았다.
이곳은 몇 개의 프로젝트가 함께 진행되는 곳이었는데, 이 모든 참가자들이 동시에 모여있다 보니 꽤 정신없었다. 나는 나와 같은 프로젝트에 참가하는 일본 친구를 만났다. 나보다 나이가 한참 어린 동생이었지만, 영어로 이야기를 하니 나이 차이가 그리 느껴지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내 입장인지, 한 번씩 그 친구가 나더러 ‘오네상’이라고 환기시켜 주긴 했다.) 귀여운 외모에 생글거리는 인상이라 어딜 가든 사람들에게 예쁨을 받는 타입이었다. 이 친구도 워크캠프 끝나고 며칠 동안 멕시코 시티를 여행할 거라고 해서 함께 여행하기로 결정할 정도로 코드는 잘 맞았다.
그렇게 이 친구를 만나고 다른 팀원들을 기다리며 안내를 기다렸는데, 다른 팀들은 캠프리더와 팀원을 찾아서 각자 스케줄 대로 이동을 했지만 나와 이 일본 친구 둘만 덩그러니 남겨졌다. 알고 보니 이번주 합류하는 우리 팀 멤버는 우리 둘에 이탈리아 친구 한 명, 한국인 친구 한 명이었다. 둘 다 비행기 사정으로 하루 정도 있다 합류하게 되었다고 했다. 게다가 우리 팀의 캠프리더도 부재했다. 우리보다 한 주 앞서 프로젝트를 시작한 팀을 인솔하러 갔다고 했다. 그렇게 우린 건물 안 마당 벤치에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그러자 아까 안내데스크에 있던 남자가 다가왔다. 사실 이 남자에 대한 첫인상은 좋지 않았다. 반삭 머리에 날카로운 눈빛에 다부진 체격의 상남자 느낌인 사람이, 날 보자마자 다짜고짜 “You owe me $$$ peso.”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길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 이랬다면 상당히 경계했을 것 같은데, 알고 보니 현지 참가비를 자기한테 내면 된다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니 나는 이 사람과 대면한 후 첫마디였지만, 이 남자는 그날 오전 내내 신규 참가자들 인사하고 참가비 접수 및 등록 절차를 하다 보니, 아무 생각 없어서 인사나 기타 형식적인 대화를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아무튼 이 남자가 우리에게 다가와서는 “너넨 이제 뭐 할 거냐? 할 일 없으면 내가 동네 구경이나 시켜줄까?”라고 했다. 좀 떨떠름했지만, 일본 친구와 나는 달리 할 일이 없기도 해서 따라나섰다. 자기 혼자 인솔하기엔 역부족이라 생각했는지, 그날 휴무인 친구를 불러냈다. 그렇게 우린 산 크리스토발 동네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워크캠프 일정 중엔 포함되지 않던 동네까지 돌아다니다 보니, 집 담장에 깨진 병을 시멘트 속에 심어놓은 집들이 많이 보였다. 담을 타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용도라고 했다. 난 본 적이 없지만, 나보다 조금 더 연장자들에게 깨진 병이 있는 담장 이야기를 하면 바로 용도를 이해했다. 생각해 보니 내가 아주 어릴 때 동네의 주택 담장에도 뾰족한 갈고리 모양의 철들이 있었던 것 같다.
점심시간이 되어 식당을 찾아가기로 했다. 안내데스크 남자는 태국 요리가 먹고 싶다며, 맛집을 안다고 했다. 그의 친구도 ‘그 집 좋지’하면서 따라나섰다. 일본친구와 난 멕시코에 도착하자마자 태국 요리를 먹으러 가게 생겼는데, 한참을 찾아 헤맸지만 태국 요릿집을 찾지 못했다. 알고 보니 그 사이에 폐업을 해서 다른 가게로 바뀌었던 거다. 그렇게 다시 다른 레스토랑을 찾았다. 이번엔 피자가 어떠냐고 물어서 내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우린 지금 막 멕시코에 도착했는데, 아직 멕시코 요리는 하나도 못 먹고 태국요리, 피자만 찾아다니냐?” 결국 우린 피자도 먹을 수 있고 멕시코 전통요리도 먹을 수 있는 곳으로 갔다. (사실 어디든 다 간단한 멕시코 음식은 있으니까.)
이곳은 매주 새로운 프로젝트 팀원을 받다 보니, 내게는 멕시코 첫날이지만 안내데스크 남자에겐 매일 같은 날 중 하나였고, 그러다 보니 오늘은 피자, 내일은 태국요리, 모레는 일식 같은 것이 땡길 수도 있는 것이었다. 나중에 이 안내데스크 남자와 친해졌을 때 이 친구가 그런 말을 했다. “내 직업은 매주 새로운 친구들을 많이 사귈 수 있어서 좋아. 대신 매주 이별을 해야한다는 건 좀 아쉬워.”
그렇게 밥을 먹은 후, 또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현지 술인 포슈 Poche를 파는 곳도 가서 시음을 했다. 멕시코 술 하면 데낄라가 떠오르는데, 이 술은 훨씬 저렴하고 남자들이 즐겨 찾는 술인 듯했다. 예쁜 병에 들어있어서 내 눈엔 귀엽게 보였는데, 현지의 젊은 여자들에겐 이 술 마시는 건 세련되지 못하단 인식이 있는 듯했다.
그렇게 걷다가 해 질 녘 동네 높은 곳에 있는 성당엘 올라갔다. (다녀온 후 정보를 최대한 조합해서 추측해 보자면 과달루페 성당이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그날의 느낌과는 달라 보여서 정확한지 모르겠다.) 계단을 한참 올라갔고, 성당 문 앞의 아이스크림 행상이 있었고, 그 위에서 해 질 녘에 보이는 풍경이 묘하게 아련했다. 나중에 워크캠프 팀원들과 과달루페 성당을 다시 찾았던 것 같은데 첫날의 그 느낌은 못 받았다.
아마 첫날, 약간의 설렘과 긴장 속에서 믿을 수 있는 현지인인 워크캠프 스태프의 안내로 원래 없던 방향감각을 무력화시킨 상태로 했던 도시산책의 결과물이라 생각한다. 이마저도 원래 있던 프로그램은 아니고, 캠프리더도 없고 다른 팀원들도 없이 일본 친구와 나 둘만 덩그러니 있는 게 안쓰러워 보여 내어 준, 현지 스태프의 호의 덕분이었다.
그날은 잘 몰랐지만, 낯선 곳에서 이런 감각으로 도시 산책을 할 수 있는 경험은 흔치 않다. 내가 돌아다닐 때면 긴장 속에서 목적지를 향해 미션을 수행하듯 다녔을 테니 산책과는 거리가 멀었을 거다. 혹여 나중에 좀 더 멀리, 구석구석 돌아다닐 마음이 내킬 때면 이미 그 동네에 대한 첫날의 설렘과 긴장은 사라졌을 테다. 그래서 내겐 드문 감각의 도시 산책을 하게해줘서, 멕시코 워크캠프에 참여한 걸 참 잘한 선택이라 생각한다. (본격적인 프로젝트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