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여행자는 관광객과는 다른 종족이다. 내가 생각하는 관광객은 TV나 책에서 보던 장소를 직접 가보는 사람, 그리고 현지에서 소비를 해보는 사람이다. 이에 비해 여행자는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내가 갖고 있는 장기 여행자에 대한 이미지로만 정의해 보자면, 특유의 시간 리듬으로 여행이란 층위에서 장시간 생존하며 부유하는 존재라고 할까? 특정 지역에서 아무리 오래 머무른다 한들, 그 지역에 뿌리 박혀 살고 있는 사람들의 정치, 경제의 복잡한 현실로부터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게 마련이니까. 대신 어느 동네에서든 자신만의 리듬으로 생존할 수 있는 생존력이 있는 사람들이라 생각한다.
나는 그런 유연한 생존력이 부족한 사람이라 생각해서 여행에는 별 재능이 없다고 생각한다. 낯선 곳에 감각을 오픈해서 받아들이지 못하고, 미리 정해진 정보를 열심히 찾아보고, 거기서 벗어난 상황에 당황한다.
무서웠던 멕시코의 첫새벽을 거쳐, 다음날 국내선을 갈아타기 위한 공항에서부터 예상을 벗어나는 상황이 있었다. 국내에서 바로 페소로 환전이 안되어, 약간의 경비만 달러로 준비하고 나머지 멕시코 여행 경비는 시티은행에 계좌를 개설하여 넣어두었다. 씨티은행에서 발급해 주는 현금 카드로 멕시코 현지 은행에서 바로 페소를 인출할 수 있다고 해서다. 만약에 대비해서 현금 카드를 두 가지 준비해서 갔다.
멕시코 공항에서 ATM을 사용하려는데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처음엔 ATM 기계 고장인 줄 알았는데, 내 뒤에 있던 사람들이 무사히 인출하는 것을 보고 내 카드에 문제가 있음을 알았다. 정 안되면 신용카드로 어떻게든 해결은 할 수 있겠지만, 현금을 아예 준비하지 못하니 당황스러웠다. 여전히 멕시코란 나라에 대한 긴장이 풀리지 않은 상황이라 좀 많이 당황했다. 잠시 후 정신을 가다듬고, 다른 현금 카드를 사용해서 한 번 더 시도해 보기로 했다. 분실에 대비해서 가방 깊숙이 분리해서 숨겨놓은 카드를 꺼내기 위해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 칸 안에서 약간의 서러움이 올라오는 걸 눌러 내리며 다른 현금 카드를 꺼냈다. 천만다행으로 이 현금카드는 무사히 작동이 되었다.
간신히 멕시코 여정의 첫 발을 이어나갔다. 그렇게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치아파스주의 툭스틀라 공항에 내려 택시 멤버들을 만났다. 첫 우연한 만남이었다. 20대 후반이었던 남자는 멕시코 건축가라고 했고, 한 달여의 여름휴가를 산 크리스토발에서 보내기 위해 왔다고 했다. 프랑스 그랑제꼴 HEC에 다니는 친구는 나와 같은 워크캠프의 자연보존 프로젝트에 참가하러 왔다고 했다. 이 친구들은 비행기에서부터 이미 안면을 텄고, 프랑스 친구가 워크캠프 측에서 추천해 준 호스텔에 묵겠다고 하자 멕시코 건축가도 그곳에 함께 묵을 예정이라고 했다.
나는 미리 다른 호스텔을 예약해 뒀다. 호스텔이지만 도미토리 형태가 아닌 1인실이 가능한 곳을 찾다 보니 한 군데가 있었다. 가급적 혼자만의 공간에서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고 싶어서였다. 홈페이지를 보니 ‘현지인과 결혼해서 현지 상황도 잘 알아 많은 서비스를 제공해 줄 수 있는 곳’이라며 열정적으로 홍보를 해 둔 곳이었다. 내가 먼저 예약해 둔 호스텔에 내리게 되자 프랑스 친구는 짐을 풀고 나중에 메일로 연락할 테니 시간 맞으면 같이 저녁을 먹자고 했다. (현지 폰을 사용하지 않아서 전화번호가 없었다.)
이렇게 그들과 헤어진 후 체크인했던 호스텔은 내 예상과는 많이 달랐다. 그 호스텔 주인 역시 내가 예상과 다른 손님인 듯했다. 자신이 예상한 손님들은 서구권 백인들이었다는 나름의 가설을 세워본다. 나는 이곳이 매우 불친절하고, 카드 수수료를 추가로 요구하며(멕시코는 다 그런 줄 알았는데 이곳만 그랬다), 첫마디부터 자기네 유료 서비스만 잔뜩 소개하는 곳이라 여겼다. 그런데 다음날 조식 시간에 옆자리에 앉은 서구권 백인 손님들이 이곳을 무척 친절한 곳이라 만족하고, 추천한다고 해서 내가 세운 가설을 여전히 확신하는 중이다.
천장이 높은 방을 배정받고, 짐을 풀었다. 그래도 이곳의 여정이 이제 시작되는 것 같아 좀 설렜다. 한동안 메일을 확인했는데 메일이 오지 않았다. 일정이 안 맞나 싶어 혼자 밖으로 돌아다녀보기로 했다. (다음날 워크캠프에서 만나 그 친구 얘기를 들어보니 그대로 곯아떨어져서 잠이 들었다고 했다.)
다행히 블로그들을 보면서 맛집이라는 곳의 정보를 파악하고 그 집까지는 무사히 찾아갔다. 한국에서 알던 멕시코 음식과 현지식은 많이 달랐다. 퀘사디야, 나초, 화히타 같은 음식들만 접했던지라 멕시코 음식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현지에서는 몰레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다양한 소스들과 함께 나오는 음식은 상당히 낯선 맛이었다. 그래도 음식은 입에 맞았다.
음식이 나오자 옆에 따뜻한 천으로 감싼 바구니를 가져다줬다. 공짜로 주는 또띠야를 정말 푸짐하게 줘서 기뻤는데, 기쁨은 잠시. 줘도 못 먹었다. 내가 알던 밀가루 또띠야가 아닌 옥수수 또띠야가 이렇게 목이 메는 건 줄 몰랐다. 그래도 감사히 먹고 다시 낯선 동네를 돌아다녔다.
방향 감각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닌지라, 잔뜩 긴장한 채 길거리 이름을 지도에서 놓치지 않고 따라다니며 무사히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아무 일도 없었고, 아무 말도 안 했다. 이렇게 보내면 <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 책의 ‘불쌍한 대학 친구 짐(1편참고)’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워크캠프 끝나고 멕시코 시티를 여행할 때, 같은 호스텔에 여행을 많이 한 한국인이 묵었다. 이 분은 스페인어는 거의 할 줄 몰랐지만, 여행자의 짬밥으로 슈퍼에서 음료를 살 때는 공병 보증금을 추가로 내야 한다는 사실도 눈치껏 알아들었고, 멕시코 시내에서 버스를 타면 수시로 올라타는 마리아치에게 얼마 정도를 내면 적당 한 지에 대한 감각도 있었다.
여행 첫날 내게 없었던 이런 생존력은 여행을 많이 다닐수록 점점 늘어날 거라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나는 여행자의 재능은 부족할 거라 생각한다. 산 크리스토발 지역 첫날의 내가 혼자서 아무 일도, 아무 말도 없이 돌아다녔던 것처럼. 아무 일도 없기 위해 좁은 시야로 다니다 보면, 굳이 낯선 곳을 여행자의 시선으로 볼 수 있는 수많은 기회를 놓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