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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기 May 28. 2020

<버터플라이, 모정, 연약한 것이 강하다.>

[영화] 차이나타운

                                                                                                                                                                                                                                                                                                                 






나는 김혜수를 좋아한다.


그녀가 왜 좋은지 잘 모르겠지만, 그냥 김혜수가 좋다.


그런데 얼마나 좋은지는 말할 수 있다.




우선 첫번째 그녀가 나오는 영화는 거의 전부 극장에 가서 봤다.


내가 좋아하는 장르이건 아니건.


그녀를 좋아하니 그녀를 도울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물론 안다. 내가 그녀를 돕다니 너무나 어불성설이란 걸.


그녀가 날 돕는 게 백만배 더 이치에 맞겠지만,


팬심이란 건 그런 거다.


나의 상황보다는 그의 상황에 더 마음이 쓰이는 것.




두번째 그녀가 하는 일이면 뭐든 지지하고 본다.


일일히 열거하기가 좀 그런 주제들이 있어서


뭐 다 까놓고 말하긴 좀 그렇지만,


어쨌든 난 그렇다.


김혜수라면, 그녀가 원하는 거라면


적극적인 지지자가 되어주고 싶다.




세번째 그녀가 아주아주 오랫동안,


기왕이면 죽는 그날까지 배우로 살기를 소망한다.


그게 그녀에게도 좋은 일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세상을 위해서는 좋은 일이라고 믿는다.




너무 무모한 애정일까?


그래도 어쨌든 내가 김혜수라는 배우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인 듯하다.




그런데 이번엔 극장에 가지 못했다.


개봉 당시 좀 복잡한 상황에 있었고,


뭐 여러 가지 개인적인 이유로 영화를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거금을 주고 (내게는!) 쿡 티브로 봤다.


나의 팬심이란... ㅋㅋㅋ






영화를 보기 전 몇몇 평론가들의 한 줄 평점에 대해 읽었다.


뭐, 좋다는 평도 있고 그렇지 않은 평들도 있었지만,


나는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출연한 영화인데 무슨!






그리고 영화가 끝나고 한 시간 정도 멍하니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김혜수가 나온 영화는 늘 좋았지만,


별로 였던 영화도 다 감독 탓이었을 뿐, 그녀의 문제는 아니었지만...(최소한 내게는!)


<차이나 타운>은 그런 생각조차 할 수가 없을 만큼...


너무나 좋았다.


그 존재감 하나로 영화가 내내 빛을 냈으니까.






이제 영화로!


영화 <차이나타운>을 보며


세 가지 생각을 했다.


버터플라이, 모정, 연약한 것의 강인함.






만약 일영이 석현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석현이 일영에게 친철하게 대할 틈이 없었더라면,


이 모든 악연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더 앞서 일영이 탁의 눈에 들지 않았더라면


이들의 삶이 달라졌을까?


인생이 꼬일 거라는 엄마의 말은 그 모든 것을 담으려는 것이었을까.


아무도 의도하지 않았는데, 그럴 줄 몰랐는데


결국 어마무시한 결말을 일으키고 마는 나비효과.


그건 정말 막을 수 없는, 대비할 수 없는 것인 건가?






모정.


보이는 듯 보이지 않는 듯,


영화 전체를 끌어가는 힘이다.


정확히는 가족, 혈연의 정.


피가 이어져야만 가족이 되는 건 아니다.


그와는 다르지만,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이 깊은 가족의 정도


세상에는 여럿 존재하는 거니까.


일영의 가족이 그렇다.


그들만큼의 진한 피는 쉽사리 볼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죽이고 싶을 만큼, 죽여야 할 만큼, 죽을 수밖에 없을 만큼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니까.


여성 느와르가 어쩌고 저쩌고 그런 건 모르겠다.


마음에 와닿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들의 감정만은 선명하게 와닿는다.


영화가 구태여 선명하게 보여주려고 하지 않아도 보인다.


엄마와 일영의 감정 뿐 아니라,


우곤과 쏭, 홍주의 감정까지.


영화가 끝나고도 한참 동안 움직이지 못했던 건 바로 이 감정들 때문이었다.


내가 여자라서 그런 걸까?


엄마의 배에 칼을 꽂는 일영과, 그 손을 잡아주는 엄마와,


더욱 힘을 줘 빨리 끝맺으려는 일영의 손끝에서


흘러왔던 모든 감정이 뚝 멈춰버렸다.


더 정확히는 '우리 일영이 이제 다 컸구나' 라는 엄마의 대사에서.




가장 절실한 믿음이었기에 배신에 답을 죽임이라고 정한 홍주와


죽음의 마지막 순간 결국 최고의 살수가 되고마는 우곤을 통해,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어리석은 자신의 핏줄을 끊음으로써


마지막 혈연을 지켰던 쏭을 통해


심장으로 흘러들었던 감정이


툭 멈췄다. 그리고 잠시 뒤,


콸콸 다시 흘러내렸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일영의 감정도 그러했으리라.






최악의 상황을 겪는다는 건 어떤 걸까.


나는 이제껏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늘 전쟁이라고 생각해왔다.


맞부딛혀 실제의 피와 실제의 도륙이 일어나는 것을 기본으로


그 안에 담긴 참혹함, 비인간성, 학살, 억압, 제노사이드, 기타 등등.


전쟁을 겪는다는 게 인간에게 있어 가장 참혹한 상황이 아닐까 생각해왔다.


'전쟁 같은'이 아니라 실제의 '전쟁'.


그런데 조금 다른 관점도 보이기 시작했다.


낳아준 이가 없다는 것.


그리고 버려진다는 것.


전쟁 만큼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인간이 겪을 가장 참혹한 일 중 하나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일영이 곰곰히 되짚어졌다.


일영은 왜 그리 강했을까?


일영은 왜 그리 약했을까?


처음 겪는 친절 하나에 자아가 흔들릴 만큼 약한 존재이면서


제게 하나 뿐인 동아줄을 단호히 잘라낼 만큼 일영은 강했다.


그랬으니 마지막 코인 락커를 열어볼 수 있었겠지.


다시 생각해보면 갓 태어난 아기만큼 연약하지만 강인한 것이 없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는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제 엄마를 죽이며 성장하고 강해지는 건가.


엄마가 엄마를 죽이며 그랬듯,


일영이 엄마를 죽이며 그랬듯.


제 어미를 파먹으며 강해지는 여린 거미처럼......


그래서 극과 극은 서로 통하는 걸까. 아니면 뗄 수 없는 동전의 양면인 걸까.






<차이나 타운>에서 배우들의 연기력을 논하고 싶지는 않다.


그건 수학 공식만큼 분명한 거니까.


한 번도 필요없는데 두 번 말하는 건 배우에 대한 실례다.


마음에 와닿지도 않는 어려운 말들도 하고 싶지 않다.


머리보다 감정이 먼저 알아차리니까.


좋은 영화였고,


다시 한 번 배우 김혜수에게 감동했다는 말은 빼놓고 싶지 않다.


몇 번이고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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