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안고운 엄마
안고운, 정말 이름 따라 운명이 가는 걸까? 나는 그들에게 고운 사람이 아니었다. 초대받지 못한 불청객으로 결코 손님 대접은 받지 못했던 나, 왜 그는 나를 선택했을까? 아니다.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어차피 선택은 내가 했으니, 그에게서 답을 찾으려 하면 안 된다. 나는 왜 이 선택을 했을까? 삶의 선택을 쉽고 아무렇지 않게 해 버린 나에게 화가 난 것이다. 그 화를 대신 뿜어주는 팔팔 끓는 물, 그 물을 보려 또 노란색 믹스커피 봉지를 꺼내었다. 다섯 개째, 은서에게 마흔두 번째 메일 발송 버튼을 누르고 또다시 잘 닦여져 반짝거리기까지 한 투명한 커피 포트에 물을 담았다. 다섯 번째 믹스 커피는 그날 밤을 지새우게 한 내 선택이었다.
혹시 그것을 알고 있는가? 매일 순간순간 우리는 선택하며 살아간다는 것을… 그것이 작은 선택이든 제법 무게가 큰 선택이든 선택에 의한 대가를 어느 시점이 되면 만난다는 것을, 적어도 그때 나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상처는 아프지만 성숙하게 해 준다. 마치 물이 뜨거운 아픔을 견디어 자유로운 수증기가 되듯, 세상에는 온전히 나쁜 것도, 온전히 좋은 것도 없는 듯하다. 그게 세상이라면 그래도 발을 딛고 손을 흔들며 걸어볼 만한 게 아닐까?
처음부터 나는 안고운이 아니었다. 엄마의 재혼으로 중학교 입학 무렵 김고운에서 안고운으로 성이 바뀐 것이다. 굳이 그럴 것까진 없었지만 엄마는 아버지의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안고운이라니…, 지금 와서 생각하니 이름이 운명을 바꾼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엄마가 원망스러워졌다. 안고운이기 이전에 나는 꽤 괜찮은 삶을 살았었으니, 그때까지 내 세상은 내 생각안에서 걸음을 걸었으니 사뿐사뿐 걸음이 꽤나 가벼웠다. 이름 따라 운명이 가버린다는 생각은 어쩌면 그게 무엇이든 탓을 하고 싶은 나약함 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숨어버리고 싶은 스스로 원하지 않는 감정이 생길 때면 나는 그렇게 탓을 했다.
엄마는 또래들보다 이른 나이에 결혼을 했다. 그건 세상물정 모르는 그저 깡다구만 있었던 여학생의 멀리 보지 못했던 감정에 이끌린 잘못된 선택이었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는 농사일을 하셨고, 엄마의 집은 학교가 있는 시내와 꽤 먼 거리라 두 시간이나 걸려야 학교에 도착할 수 있었다고 한다. 늘 새벽 5시 첫차를 타고 다닌 고등학교는 하루도 지각, 결석이 없었다고 하니, 더구나 열이 40도까지 펄펄 끓는 어느 날은 오한으로 덜덜 떨면서도 담요로 몸을 싸고 등교를 했다고 하니, 엄마를 설명할 한 단어로 ‘깡다구’가 딱이었다. 그렇게 경북 최고의 명문 여고를 엄마는 졸업을 했다. 지난하게 가난한 집 둘째 딸로. 그래도 그중 가장 똑똑했던 딸로. 똑똑함에 깡다구가 붙었으니 어쩌면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엄마를 참 닮지 않았다. 한 번씩 불쑥 참지 못하고 불의에 대항해 하고 싶은 말을 할 때가 있긴 했지만, 나의 깡은 연약했다. 2남 4녀, 엄마 위로 언니가 하나, 아래로 여동생 둘, 남동생 둘. 엄마는 공부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엄마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엄마의 선택은 초등학교 교사라는 안정된 직장을 가져다주었다. 안정된 직장은 엄마의 꿈이었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 이제는 이름은 어색해지고 얼굴은 희미해진 나의 아버지.
엄마에겐 내 아버진 금기어였기에 아직 나는 두 사람이 어디서 어떻게 만났는지는 알지 못한다. 내가 알고 있는 몇 가지는 아버지의 직업, 보험 설계사, 1990년대는 보험 사업이 성장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진취적인 사람이 선택한 직업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적 인식은 부정적이었기 때문에 할아버지의 반대가 어마어마했다고 한다. 지금부터의 이야기들은 엄마가 아닌 작은 이모를 통해 듣게 된 것이다.
할아버지에게 엄마는 커다란 다이아몬드 같은 존재였다고 했다. 해가 뜨면 일어나 논일, 밭일을 하고, 새참을 드시고, 해질 무렵까지 땅이 하는 일, 하늘이 하는 일들을 거들며 흙냄새, 태양 냄새를 맡는 것 밖에 모르던 할아버지에게 엄마는 꿈이었다. 옛 노인들에게 선생님이라는 직업은 귀하디 귀한 분, 높으신 분이었기 때문에 할아버지에게 엄마는 하늘이었다. 그 하늘이 보험쟁이와 결혼을 하겠다고 하니, 할아버지는 절망을 느꼈다고 했다. 이모의 표현으로 절망이었지만 이모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절망보다 더 큰 무엇이었을 거라 상상했다.
할아버지는 자그마치 5일간 아무것도 드시지 않고, 안방에 누워, 저녁이 으스름해질 무렵에는 툇마루에 앉아 눈물을 훔치셨다고 했다. 극 노했던 그날, 붉어진 얼굴로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안된다”라고 말씀하신 이후 할아버지의 입에서는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고, 할머니는 삼시세끼 상을 봤다 할아버지 방에 가져다 드렸지만 그 상 그대로 다시 간지로 가지고 와야 했다. 할머니는 둘째 딸을 그렇게 원망했다고 했다. 그때까지도 모든 가족들은 둘째 딸의 결혼이 성사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5일간 곡기를 끊었던 할아버지의 입에서는 이런 말이 나왔다고 했다.
“날짜 봐 온나. 좋은 날로”
할아버지의 오 일간의 투쟁은 결혼 반대가 목적이 아니었다. 꿈같고 하늘 같던 딸이 원하는 바를 인정하기 위해 자신을 내려놓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할아버지가 바라보았던 저녁의 풍경, 오일 간 무수하게 스쳐갔을 생각과 갈등이 나에게 다가오는 듯해 순간 몸서리가 쳐졌다. 이모는 덧붙였다.
“언니는 아버지의 오일 간의 투쟁을 알지 못해” 그것을 이야기하기엔 엄마의 첫 번째 결혼 생활이 너무 짧았기에 말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라 여겨 어떤 가족도 그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고 했다.
“이모, 할아버지가 너무 쉽게 허락한 것 같아.”
“아버진 처음부터 완강하게 반대할 생각이 아니었어. 언니가 마음 아픈 게 싫었거든. 언니를 정말 믿고 아꼈어. 나는 어린 마음에도 그게 늘 질투가 났지”
내가 일곱 살이 되던 해, 엄마와 아버진 헤어짐을 선택했다. 그것이 주체적인 선택이었는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저 최선을 다하면 뭐든 원하는대로 이루어졌던 엄마의 깡다구 인생에서 가장 어려웠던 선택이었을 것이다. 나이를 먹으며 그 기억은 조각났지만, 그 조각들은 그대로 무척 선명해져 엄마가 느꼈을 고통의 크기가 나에게 닿았다. 참고 참았던 울음을 견디다 못해 내뱉었던 순간, 고통의 괴성들, 웃음기 사라진 푸석한 엄마의 얼굴, 꾹 다문 입술로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엄마의 손길까지 그 순간의 기억들이 선명해져 내 가슴을 후볐다.
아버지의 횡포가 심해져 엄마가 크게 다쳤을 때, 할머니, 할아버지는 한 달쯤 우리 집에 머물렀고, 어린 마음에 불안하고 걱정이 가득했던 마음이 녹아내렸던지, 그때의 안정감과 따뜻함은 다시 돌아가고 싶을 만큼 다정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할아버지의 깊은 한숨 소리는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나는 잠든척하며 할아버지가 한숨을 쉴 때마다 그 수를 헤아리기도 했다. 그러다 잠이 들어 완벽하게 한숨 소리의 횟수를 알지는 못했지만, 다음날 웃으시는 할아버지를 나는 말없이 안아주었다.
이모의 말에 따르면 아버지는 보험 일을 하며 알게 된 외부 사람들과 어울리다가 도박에 빠졌다고 한다. 심성이 착하고, 다정다감했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유약하고 줏대가 없었다고. 이모는 길게 말하지 않았지만 아버지 이야기를 하며 내내 한숨을 내 쉬었고, 도박 빚을 갚느라 엄마의 몇 푼 안 되는 월급은 차압당하고, 여러 번 엄마 앞에 무릎을 꿇고 다신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결국 도박자금 때문에 엄마를 폭행하기까지 했다는, 나중에는 할아버지께서 얼마 되지도 않는 하늘 같은 논 몇 마지기를 팔아 빛을 해결했고, 억장이 무너져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셨다는...., 그리고 몇 달 뒤 엄마는 이혼을 선택했다는 그 이야기를 이모는 내가 결혼을 고민할 무렵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그 당시 이모의 이야기가 중요하지 않았다. 다시 돌이켜 생각하면 아버지의 도박, 폭행, 할아버지의 죽음이란 불행한 엄마의 결혼 이야기를 어렵게 꺼내며 이모는 나에게 선택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그땐 알지 못했다. 나 역시 그 시절의 엄마처럼 남편이 될 남자에게 빠져 있었으니...,
엄마는 그 시절의 잘못된 선택이 큰 교훈이 되었는지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이 되던 해, 마음 좋고 능력 좋은 아저씨와 만나기를 시작했고, 몇 달 뒤 재혼을 선택했다. 그리고.., 몇 달 뒤 나는 안고운이 되었다.
“왜 하필 안 씨야?”
나는 안고운이 된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싫었다. 그래도 나보다 더 싫어했던 사람이 있었기에 위안이 되기도 했다. 그의 이름은 ‘안영웅’. 두 살 터울 아래 남동생이다. 졸지에 우리는 곱지 않은 영웅 반대인 사람이 되었다. 지금이었다면 이름까지 개명하여 이상한 상황을 모면했겠지만, 어린 우리 남매는 아무런 반항을 하지 못한 채 엄마 소원의 희생양이 되었다. 그리고 중학교를 입학하며 나는 김고운에서 안고운으로 출석부에 이름이, 명찰에 이름이 박혔다. 엄마는 다시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 내가 결혼을 하고, 안영웅이 제약회사에 취업을 하고, 새아버지와 매일 동네 산책을 하며...., 아버지란 사람이 다시 돌아오기 전까지...,
“박정순 씨 되십니까?”
“네. 제가 박정순인데요. 무슨 일이시죠?”
“김태풍 씨 아시나요?”
“네? 누구요?”
“김태풍.”
“네..., 전 남편입니다. 무슨 일이시죠?”
아버진 어느 차가운 날, 한강에서 발견되었다. 그의 나이, 59세, 아무런 연고가 없어 결국 엄마에게 전해진 아버지의 부고로 나는 며칠간 김고운으로 살 수 있었다. 엄마는 잠시, 아니 몇 달간 행복하지 못했다. 엄마 자신조차 알 수 없는 감정으로 실의에 빠져 있었다. 나는 김고운으로 살기를 원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 며칠간은 아버지를 잃은 슬픔보다는 안정되고 편안한 감정이 마음을 채웠다. 아버지를 이렇게라도 다시 볼 수 있어서였을까?
일곱 살 어린 시절, 나에게 아버진 누가 뭐래도 하늘이었다. 동생과 나에게 다정했고, 일찍 집으로 들어오는 손에는 하루는 아이스크림, 하루는 통닭이 들려 있기도 했다. 어느 날부터 아버지의 얼굴이 어두워졌고, 집에 들어오는 시간이 늦어졌으며, 어느 날부터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기억에 깊이 남아 있는 아버지는 늘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 웃음은 가식적이지 않았다. 마음 깊은 곳에서 표정으로까지 자연스럽게 스며든 웃음, 아버지의 그 웃음이 좋았다. 그때 나는 김고운이었다.
“고운아, 이거 좀 마셔”
현우였다. 계속해서 헤어질 다짐을 하고 있는 내 남편 현우다. 그가 건넨 커피를 받아 손에 쥐고 그와 헤어지려던 결심을 다시 내려놓았다. 안고운 엄마에게 현우는 든든한 사위로 누구보다 위로가 되었으니, 당분간 내 결심을 바닥에 두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