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과 만나는 시간, 수업

아이들을 만나러 교실로 갑니다.

by 심횬


만난다는 것은 서로 마주 보는 것, 그리고 함께 걷는 것, 서로, 함께! 그래서 혼자 있을 때는 만남은 이루어질 수 없다.


수업은 둘 혹은 여럿이 만나서

잘 어우러져야 즐거워진다.


“만나기 위해 교실문을 연적이 있었던가?”


나는 그것을 15년 차 교사가 되어 알게 되었다.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수업을 하는 줄로만 알았다. 수업시간에 재밌는 활동과 과제물을 만들어 그것을 설명하고 해결하는 것! 그것이 교사의 역할이라 생각했던 수많은 날들이 있었다.


그래서 언제나 수업이 짐이었던 때가 있었다. 나는 분명 열심히 공부해서 가르치는 직업인 교사가 되었는데, 왜 가르치는 수업이 이렇게 부담스러운 건지 스스로에 대한 불신과 책망으로 아프던 날들이 있었다.


그 바탕에는 나는 교사니까, 너희들을 가르치는 사람이니까 오늘은, 내일은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나?라는 의문이 있었고, 그때마다 수업 준비에 열과 성을 다했다. 하지만 매번 구멍 난 독에 물붓는 기분이였다. 분명 무언가에 결핍을 느끼고 있는데, 답을 찾지 못했다. 무수한 날들동안.


아이들은 출발지점에서 출발 신호를 기다리며 뛸 준비를 하고 있는데, 교사는 벌써 저 앞에서 결승선 띠를 들고 1등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은 가르침만을 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보지 않은 것이다. 즉 ‘만남’을 하지 못한 상황이다.


수업이 편안해지기 시작한 건 ‘아이들을 만나러 교실로 간다’는 생각이 자연스러워지면서부터이다.


‘만남’에서 중요한 것은 상대를 봐야 한다는 것이다.

분명 만났는데 상대는 나를 보지 않고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껍데기만 만난 것이다.

너와 나의 만남에서 바라봄은 정말 중요하다. 교사는 그날 수업 안에서 학생 한 명 한 명을 볼 수 있어야 한다.


학생들 역시 교사를 봐야 한다.

무너지고 있는 현실 교실에서는 사실 이 부분이 가장 어려운 문제다. 학생들 전체가 수업에 들어온 교사를 반짝이는 윤슬 같은 눈빛으로 바라봐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현실 교실에서는 책상에 엎어져 자는 학생이 존재하고 그 학생을 깨우는 것에 시작의 에너지가 소진되어 버리기도 한다. 만남의 설렘이 깨져버리는 상황이다. 그래도 그 교실에서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 반짝거림으로 바라보는 친구들이 분명 있다. 아니 대부분 그럴 것이다. 아이들에게도 수업은 만나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교사의 언어로 앞서 이야기해준다면 그 눈빛들은 더 반짝일지도 모른다.


너무 당연한 일인데, 그 당연함을 놓쳤던 수많은 수업시간들이 있었고, 만남을 우선에 두고 교실로 발걸음을 했던 수업들이 있다.


두 상황의 가장 큰 차이는 수업에서의 즐거움이다.

만나니 아이들이 먼저 보였고, 그들의 어려움, 생각들, 결과로 나아가는 과정들의 소중함이 마음에 담겼다.

높은 수업의 결과물의 기대치를 채우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렸던 내가 아이들의 과정 하나하나에 의미를 담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수업 준비는 더 촘촘하고 그들에 맞추어 할 수 있었다.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가 명확해지고, 좀 더 천천히 가도 괜찮아졌다.


오늘 교실에 들어서기 전 마음 속으로 이야기해보자.

여러 번 경험하면 자연스러워진다. 자연스러워지면

그때 내 것이 된다. 수업이 편안해진다.


‘너희들을 만나러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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