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산에 오르지 않았다

그냥이라는 말이 더 가까운 하루다 그냥....

오늘은 산에 오르지 않았다.


창가에 앉아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바라본 하늘은 등산하기 좋을 만큼 맑고 푸르다. 평소라면 서둘러 배낭을 챙기고 등산화 끈을 단단히 매고 있을 시간. 하지만 오늘은 그저 따뜻한 머그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있다. 여기, 사계절 내내 산을 오르던 내가 집에 머물러 있다.


커피에서 올라오는 김이 천천히 흩어지는 모습이 내 마음과 닮았다. 한때는 단단했던 것이 흐트러지고, 선명했던 것이 희미해지는 과정.


산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


회사에 다닐 때, 산은 나의 피난처였다.


하루의 업무가 끝나고 등산화를 신는 순간, 모든 무게가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월요일 아침의 회의, 마감에 쫓기는 시간들, 상사의 표정, 실적 압박... 그 모든 것을 산 아래 두고 오를 수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갈 때마다 마음은 가벼워졌고, 정상에 도착했을 때의 그 성취감은 어떤 업무 성과보다 값졌다.


"이번 주말에도 00산 다녀왔어요." "저 혼자 00코스 완주했답니다."


동료들에게 자랑처럼 늘어놓던 나의 등산 이야기. 그것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나의 정체성이었다. '열심히 일하고 주말에는 산에 오르는 사람'. 그게 나였다.


퇴직 후, 산이 무거워진 날


퇴직 후 산행은 달라졌다. 이제 날마다 산에 오를 수 있는 자유가 생겼다. 더 이상 주말을 기다릴 필요도, 휴가를 내서 먼 산을 찾아갈 필요도 없었다. 원하는 날 원하는 산을 오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발걸음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정상에 올라도 더 이상 사무실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 대신, 어디로 돌아가야 할지 모르는 막막함이 찾아왔다. 산에서 내려와 누구에게 이 경험을 이야기해야 할지, 이 성취감을 누구와 나눠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


오늘 아침, 평소처럼 등산 준비를 하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가지 말까?"


그리고 난 배낭을 내려놓았다.


창가에 앉아 보는 풍경


지금 나는 아파트 18층, 작은 창가에 앉아 있다. 커피잔 옆으로 오래된 등산지도가 펼쳐져 있다. 빨간 펜으로 표시한 코스들, 날짜가 적힌 메모들. 각각의 선이 나의 역사다.


창 밖으로는 멀리 산 실루엣이 보인다. 그 산도 내가 올랐던 곳 중 하나다. 오르지 않고 바라보는 산의 모습이 낯설다. 항상 그 안에 있었지, 이렇게 멀리서 온전한 모습을 바라본 적은 드물었으니까.


커피가 식어간다. 그래도 괜찮다. 오늘은 서두를 일이 없으니까.


나는 무엇을 그리워하는 걸까? 산 자체일까, 아니면 회사 생활 중 산에 오르던 그 삶의 리듬일까? 혹은 내가 누군가에게 "저는 산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그 선명한 정체성일까?


새로운 지도를 그리는 시간


문득 깨달았다. 나는 지금 인생의 새로운 지도를 그리는 중이다.


퇴직이라는 것은 단순히 일을 그만두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지형도가 완전히 바뀌는 것이다. 매일 아침 일어나 출근하고, 주어진 책임을 다하고, 주말이면 그것을 위로받던 리듬. 그 모든 것이 사라진 자리에 새로운 무언가를 채워야 한다.


그리고 그건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회사에서의 첫날을 기억하는가? 낯설고, 어색하고, 때로는 두렵기까지 했던. 퇴직 후의 삶도 그렇다. 새로운 시작이며, 적응이 필요한 시간이다.


산에 오르는 것이 슬프게 느껴진다면, 잠시 산에서 내려와도 좋다. 평지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보는 시간을 가져도 좋다. 그렇게 찾은 길이 결국 다시 산으로 이어질 수도 있고, 아니면 전혀 다른 곳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걷는 것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시니어의 걸음, 더 깊어지는 풍경


우리는 종종 '은퇴'와 '노년'을 삶의 끝자락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새로운 시작이다. 지금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긴 제2의 인생을 살아갈 기회를 갖고 있다.


시니어의 산행은 청년의 그것과 다르다. 속도는 더 느릴지 모르지만, 풍경을 바라보는 눈은 더 깊다. 발걸음은 조심스러울지 모르지만, 그 의미는 더 무게있다.


나는 오늘 산에 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내일은 다시 올라갈 것이다. 아니면 모레, 혹은 그 다음 날. 중요한 것은 내가 아직 걸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다른 마음으로 오를 것이다. 회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만나기 위해서. 누군가에게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스스로 기뻐하기 위해서.


모든 시니어에게 보내는 편지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당신도 혹시 나처럼 커피잔을 앞에 두고 무언가를 그리워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오랫동안 해오던 일이 갑자기 의미를 잃어버린 것 같은 기분, 혹은 매일 하던 일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된 상실감.


괜찮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인생의, 새로운 산을 오르기 위한 준비 과정이다.


오늘은 커피 한 잔과 함께 잠시 쉬어가자. 창밖을 바라보며, 지나온 길을 돌아보자. 그리고 내일은, 혹은 그 다음 날에는 새로운 걸음을 내딛자.


당신이 걸어온 길이 헛되지 않았듯이, 앞으로 걸어갈 길도 의미 있을 것이다. 퇴직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산에서 한 봉우리를 넘으면 또 다른 봉우리가 나타나는 것처럼, 인생도 그렇게 계속된다.


이제는 남을 위한 산행이 아닌, 온전히 나를 위한 산행을 시작할 때다.


오늘은 산에 오르지 않았지만, 내일은 다시 오를 것이다. 그리고 그 산은, 어제의 산과 같으면서도 다른 산일 것이다.


우리 모두, 새로운 산을 향해 함께 걸어가자.


커피가 식기 전에, 다시 한번 따뜻한 온기를 느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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