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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래가는 영혼의 마지막 춤

- 삶의 끝자락에서 존엄을 지키는 이들의 이야기 -

by 시가 별빛으로 눕다 Mar 18. 2025

살아온 모든 날들이 투명 유리처럼 반사된다. 시간의 경계가 흐려진 공간에서, 그들은 각자의 색으로 빛나고 있다. 노란색, 초록색, 빨강색, 검정색, 흰색. 다섯 가지 색깔처럼 다른 인생을 살아온 이들이 마지막 여정을 함께 걷는 풍경. 그 풍경 속으로 잠시 들어가 보자.

공동체 1실의 빛과 그림자

공동체 1실, 6인실. 이곳은 여섯 명의 노인들이 마지막 여정을 함께하는 공간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각양각색의 인생이 한 데 모여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마치 오방색처럼 각자 다른 색을 품고 있는 사람들.

창가에 놓인 침대에는 항상 트로트를 크게 틀어놓는 김영순 할머니(86)가 있다. 귀가 잘 들리지 않아 볼륨을 최대로 올려놓는다. 그녀의 침대 주변에는 오래된 가요 CD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고향의 봄"이 흘러나올 때면 그녀는 가사를 한 자 한 자 따라 부른다. 입술은 마르고 갈라졌지만, 눈은 젊은 시절의 반짝임을 간직하고 있다.

그 옆에는 박정호 할아버지(92)가 있다. 그는 항상 두 눈을 감고 있다. 자고 있는 것 같지만, 가만히 다가가면 느닷없이 눈을 뜨고 바라본다. 그 눈빛에는 백 년의 세월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그는 가끔 악몽에 시달린다. 입에서 "엎드려! 포탄이야!"라는 외침이 새어 나올 때면, 병실은 일시적으로 긴장감에 휩싸인다.

중앙의 침대에는 이미경 할머니(81)가 있다. 그녀는 하루 종일 옆 침대의 최 할머니를 바라보며 비난을 쏟아낸다. "저 여자가 내 물건을 훔쳤어! 내 지갑이 없어졌다고!" 사실 이 할머니의 지갑은 이미 10년 전에 딸이 가져갔다. 하지만 그녀의 기억 속에서는 여전히 지갑이 어제 사라진 것처럼 생생하다.

가장 안쪽 침대에는 최순자 할머니(89)가 깊은 잠에 빠져 있다. 그녀는 일주일 전 뇌졸중으로 의식이 희미해졌다. 간호사들은 두 시간마다 그녀의 자세를 바꿔주고, 물수건으로 입술을 적셔준다. 그녀의 숨소리는 마치 바람이 나뭇잎 사이를 지나가는 소리 같다. 미세하고 가늘다.

창문 쪽 침대에는 신동철 할아버지(84)가 가요책을 들여다보며 박자를 맞추고 있다. 그는 젊은 시절의 꿈은 가수였다고 한다. 치매로 많은 것을 잊어버렸지만, 노래만큼은 여전히 정확하게 기억한다. 몸은 점점 쇠약해져 가지만, 그의 목소리만큼은 여전히 힘이 있다.

마지막으로, 출입구 가까운 침대에는 정지영 할머니(88)가 신문을 보며 필사를 하고 있다. 손은 떨리지만, 글씨는 놀라울 정도로 정갈하다. 평생 초등학교 교사로 일했던 그녀는 치매 진단을 받은 후에도 매일 신문의 주요 기사를 노트에 옮겨 적는다. "기억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그녀는 말한다. 그러나 어제 쓴 내용을 오늘 다시 쓰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모른다.

색의 내면에 숨겨진 이야기들

노인들의 삶의 흔적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빨, 주, 노, 초, 파, 남, 보. 그들은 어떤 색을 가졌을까. 그 어떤 고전보다, 그 어떤 명언보다 값진 인생을 배울 수 있을 것 같다.

김영순 할머니의 색은 빨간색이다. 열정적이고 밝은 그녀는 평생 시장에서 생선을 팔았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밤 9시에 돌아오는 고된 일상이었지만, 그녀는 항상 웃음을 잃지 않았다. 5명의 자녀를 모두 대학에 보낸 것이 그녀의 자랑이다. 지금은 자신이 누구인지도 가끔 헷갈리지만, 생선 가격을 부르는 목소리만큼은 여전히 우렁차다.

"고등어 한 마리 7천원! 싱싱한 고등어!"

간호사가 약을 건네면 그녀는 순간적으로 시장의 생선 판매자로 돌아간다. 그녀의 뇌 속에서는 병원 침대가 아닌, 시끌벅적한 시장 한가운데 있는 것이다. 약은 그녀에게 판매할 생선이 되고, 간호사는 손님이 된다.

박정호 할아버지의 색은 검정색이다. 깊고 무거운 그의 삶은 전쟁의 그림자로 뒤덮여 있다. 스물 한 살에 전쟁터로 끌려간 그는 세 번의 부상을 입고도 살아 돌아왔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 상처는 육체의 상처보다 깊었다. 평생 악몽에 시달렸고, 큰 소리만 들려도 몸을 굽혔다. 가족들은 그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왜 항상 화가 나 있어요?"라고 손주들이 묻곤 했다. 그는 대답할 수 없었다. 어떻게 죽음의 공포를 겪어보지 않은 이들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

오늘도 그는 두 눈을 감고 있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또 다른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마침내 평화를 찾은 것일까.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이미경 할머니의 색은 노란색이다. 밝고 화려했던 그녀는 한때 동네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20대에 미스코리아 지역 예선에 나갔던 그녀는 결혼 후에도 항상 자신을 가꾸는 데 소홀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편의 외도와 파산은 그녀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다. 의심과 불안이 그녀의 마음을 잠식했다. 치매가 찾아왔을 때, 그녀의 의심은 더욱 깊어졌다. 이제 그녀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물건을 훔치려 한다고 생각한다.

"내 반지! 내 다이아몬드 반지가 없어졌어!"

사실 그 반지는 30년 전 남편의 빚을 갚기 위해 팔았다. 하지만 그녀의 기억 속에서는 여전히 손가락에 있어야 할 것이다. 그녀가 손가락을 만지작거릴 때마다, 간호사들은 그녀가 무엇을 찾고 있는지 안다. 그것은 단순한 반지가 아니라, 화려했던 과거, 행복했던 시절의 상징이다.

최순자 할머니의 색은 흰색이다. 순수하고 단순한 삶을 살아온 그녀는 시골에서 평생을 보냈다. 채소를 기르고, 손주들을 돌보는 것이 그녀의 일상이었다. 그녀에게 세상은 복잡하지 않았다.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잠드는 자연의 리듬에 맞춰 살았다. 뇌졸중으로 쓰러지기 전날까지도 그녀는 작은 텃밭을 가꾸고 있었다.

이제 그녀는 깊은 잠에 빠져 있다. 그 잠에서 그녀는 무엇을 꿈꾸고 있을까? 푸른 채소밭? 뛰어노는 손주들? 아니면 어머니의 품? 그녀의 평온한 얼굴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신동철 할아버지의 색은 파란색이다. 깊고 감성적인 그는 평생 음악을 사랑했다. 서울에서 태어나 음악대학에 진학했지만,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대신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음악 교실을 열었다. 수많은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쳤고, 마을 합창단을 이끌었다. 그의 삶은 음표로 가득 차 있었다.

치매가 찾아왔을 때, 가장 먼저 잊혀진 것은 이름들이었다. 아내의 이름, 자식들의 이름, 심지어 자신의 이름까지. 그러나 노래만큼은 완벽하게 기억한다. "고향의 봄"을 부를 때면, 그의 목소리는 60년 전 음악대학 시절로 돌아간다. 맑고 깊은 음색으로 병실을 채운다.

정지영 할머니의 색은 초록색이다. 성장과 배움을 상징하는 그녀는 40년 동안 초등학교 교사로 일했다. 수천 명의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쳤고, 그들의 성장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인생은 남을 위한 것이었다. 자신의 아이를 갖지 못했지만, 모든 학생들이 그녀의 아이였다.

치매가 찾아왔을 때, 그녀는 필사를 시작했다. 마치 글자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신문의 모든 단어를 공책에 옮겨 적는다. 그것은 그녀만의 투쟁 방식이다. 기억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자신의 정체성이 흐려지는 것에 대한 저항.

두 눈을 감고 계시는 박정호 할아버지의 모습이 내 심장에 와 박힌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할까. 어지러움증이 눈앞을 가린다. 노인의 가슴에 남아 있는 그 불꽃을 다시 피울 수 있을까.

그들의 품에 아직 사그라들지 않은 불꽃이 있다면 피울 수 있게 손을 보태리라 다짐해 본다. 노인들의 색이 바래지 않도록, 그들의 이야기가 잊히지 않도록.

색이 바래도 남는 것들

시간이 흐르면서, 공동체 1실의 색깔들은 조금씩 바래간다. 김영순 할머니의 빨간색은 이제 분홍빛으로 옅어졌다. 트로트를 틀어놓는 시간이 줄어들고, 그녀는 더 많은 시간을 침묵 속에서 보낸다. 가끔 그녀의 입에서 생선 가격을 부르는 소리가 새어 나오지만, 그 목소리는 점점 작아진다.

박정호 할아버지의 검은색은 더욱 짙어진다. 그는 이제 눈을 거의 뜨지 않는다. 간호사가 다가가도, 가족이 방문해도, 그는 반응하지 않는다. 마치 이미 다른 세계로 떠나버린 것 같다. 그러나 가끔, 아주 가끔, 전쟁 이야기가 나올 때면 그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직인다. 그는 여전히 듣고 있다.

이미경 할머니의 노란색은 갈색으로 변했다. 그녀의 비난은 점점 줄어들고, 대신 긴 침묵의 시간이 늘어난다. 가끔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며 웃는다. 무엇을 보는 것일까? 젊은 시절의 자신? 아니면 오래전에 떠난 남편? 그녀만이 알 수 있는 비밀이다.

최순자 할머니는 백일 후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흰색은 이제 이 세상에 없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녀가 떠난 후에도 병실에는 그녀의 향기가 남아있는 것 같다. 창가에 놓인 화분에서 자라는 작은 새싹은 그녀가 남긴 마지막 선물이다.

신동철 할아버지의 파란색은 더욱 깊어진다. 그는 이제 노래책을 보지 않고도 모든 가사를 기억한다. 그의 노래는 병실 전체를 채우고, 때로는 다른 환자들도 함께 따라 부른다. 음악은 그들을 하나로 연결하는 다리가 된다. 기억을 잃어가는 이들에게, 노래는 마지막까지 남는 친구다.

정지영 할머니의 초록색은 점점 옅어진다. 그녀의 필사는 계속되지만, 글씨는 점점 흐트러진다. 직선이 곡선이 되고, 단어가 불완전해진다. 그러나 그녀는 멈추지 않는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는 글자를 쫓아가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나의 10년 후 어떤 모습일까. 그때도 지금처럼 오지랖이 넓을까. 아님 세월에 지쳐 커피 한 잔 손에 들고서 향기에 취해 있을까.

노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익어가는 세월이 더 이상 누군가의 손을 필요로 하고 누군가의 정원에 피해가 가는 인생은 허락하지 않으리라 다짐해 본다. 그러기 위해 홀로 노는 연습을 진행 중이다. 하루종일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가는 볼륨 높은 인생은 살지 말아야지. 순간 순간 변하는 팔색조 같은 인생은 살지 말아야지.

무릎 꿇어 눈물로 기도하는 새벽  

오늘도 나는 이곳에 온다. 공동체 1실, 여섯 개의 침대, 여섯 개의 인생이 모인 이곳. 내 손으로 그들의 몸을 씻기고, 먹이고, 닦아준다. 때로는 지치고, 때로는 슬프지만, 나는 계속해서 그들 곁에 있다.


주님, 김영순 할머니에게 평안을 주소서. 그녀의 열정이 완전히 사그라들기 전에, 그녀가 한 번 더 웃을 수 있도록. 그녀가 자신의 삶을 자랑스럽게 기억할 수 있도록.


주님, 박정호 할아버지의 전쟁이 끝나게 하소서. 70년 동안 그를 괴롭혀온 악몽에서 해방되게 하소서. 그가 마침내 평화를 찾을 수 있도록.


주님, 이미경 할머니의 의심을 거두어 주소서. 그녀의 마음에 있는 상처를 치유해 주소서. 그녀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남아있는 것들에 감사할 수 있도록.


주님, 최순자 할머니를 당신 품에 안아주소서. 그녀의 영혼이 평안히 쉴 수 있도록. 그녀의 삶이 헛되지 않았음을, 그녀가 남긴 사랑이 여전히 이곳에 있음을 알게 하소서.


주님, 신동철 할아버지의 노래가 계속되게 하소서. 음악이 그의 마음에 빛을 비추게 하소서. 그가 노래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다른 이들과 연결될 수 있도록.


주님, 정지영 할머니의 손을 인도하소서. 그녀가 글자를 쓰는 동안, 그녀의 존엄성을 지켜주소서. 그녀가 자신의 이야기를 끝까지 쓸 수 있도록.


그리고 주님, 저를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제가 지치지 않고 그들을 돌볼 수 있도록. 제가 그들의 색깔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갖도록. 제가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 있는 마음을 갖도록.


언젠가 저도 그들처럼 될 것입니다. 언젠가 저도 누군가의 손길을 필요로 할 것입니다. 그때 누군가가 저에게도 같은 존중과 사랑을 보여주기를 바랍니다. 오늘밤은 볼륨이 줄어들길 바라며 문을 나섭니다.


어른 - Sondia (손디아)


고단한 하루 끝에 떨구는 눈물


난 어디를 향해 가는 걸까


아플 만큼 아팠다 생각했는데


아직도 한참 남은 건가 봐


이 넓은 세상에 혼자인 것처럼


아무도 내 맘을 보려 하지 않고


눈을 감아 보면


내게 보이는 내 모습


지치지 말고 잠시 멈추라고


깰 것 같지 않던 짙은 나의 어둠은


나를 버리면 모두 깰 거라고


웃는 사람들 틈에 이방인처럼


혼자만 모든 걸 잃은 표정


정신없이 한참을 뛰었던 걸까


이제는 너무 멀어진 꿈들


이 오랜 슬픔이 그치기는 할까


언젠가 한 번쯤 따스한 햇살이 내릴까




치매 노인들의 마지막 여정은 색이 바래가는 과정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색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존엄성을 지켜줄 수 있다. 그들의 마지막 불꽃이 꺼지지 않도록 손을 내밀 수 있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일이다. 언젠가 우리 모두는 그 여정을 걷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도 누군가의 따뜻한 손길을 기다리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가 베푸는 사랑과 존중은, 미래의 우리를 위한 약속이기도 하다. 오늘밤, 공동체 1실의 불빛이 꺼져도, 그들의 이야기는 계속될 것이다. 그들의 색깔은 우리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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