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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가 없도록 이 가슴이 아파도

여자의 일생이라는 노랫가락은 빗물과 함께 춤을 추고

by 시가 별빛으로 눕다 Mar 22. 2025

가끔은 삶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 아픔의 형태로 찾아올 때가 있다. 기억이라는 보물을 잃어가는 노인과 그를 지켜보는 이들의 이야기. 마치 세피아 빛 필름으로 촬영된 오래된 영화처럼

방황 하는 영혼  

비가 내리는 오후, 요양원의 창문으로 빗방울이 흘러내린다. 마치 누군가의 눈물처럼. 복도를 따라 끊임없이 서성이는 노인의 발걸음 소리가 빗소리와 어우러진다.


노인은 하루종일 서성거린다. 먹이를 찾아 헤매이는 하이에나처럼. 때로는 분주하게, 때로는 느릿하게, 하지만 결코 멈추지 않는다. 마치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그것을 찾기 위해 애쓰는 것처럼. 어쩌면 그는 자기 자신을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의 눈빛은 저 멀리, 아무도 닿을 수 없는 곳을 응시하고 있다. 창백한 얼굴은 주름으로 가득하지만, 그 주름 하나하나에는 그의 인생이 새겨져 있다. 젊은 시절 뙤약볕 아래 땀 흘리며 일했던 기억, 아내와 처음 만났던 봄날의 떨림, 첫 아이가 태어났을 때의 벅찬 기쁨,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둘 떠나보낸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


그는 서랍장 앞에 멈춰 서서 서랍을 뒤진다. 무엇을 찾고 있는 걸까? 지갑? 안경? 아니면 옛 사진? 누군가 다가가 물으면 그는 잠시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대답한다. "집에 가야 해... 내 물건을 챙겨야 해..." 하지만 그에게 '집'이란 무엇일까? 50년 전 그가 자랐던 시골 마을의 초가집? 30년간 살았던 서울의 아파트? 아니면 지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오직 그의 기억 속에만 남아있는 어떤 장소?


복도 끝에 다다르면 그는 잠시 멈춰 창밖을 바라본다. 그의 눈동자에 비치는 풍경은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을까? 아니면 그는 지금 60년 전 고향 마을의 들판을 보고 있을까? 깊은 한숨을 내쉰 후, 그는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같은 복도를 따라, 같은 문들을 지나, 끝없는 원을 그리듯 맴돌며.


때로는 그가 문득 멈춰 서서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 

"영순아... 영순아 어디 있어?" 그의 목소리에는 절박함이 묻어있다. 영순이는 그의 아내였을까, 딸이었을까, 아니면 어머니였을까? 기억의 파편 속에서 그는 사랑했던 사람들을 필사적으로 찾고 있다. 하지만 그 이름을 부를 때마다, 대답은 오지 않는다. 오직 복도의 적막한 공기만이 그의 목소리를 삼켜버릴 뿐.


그의 호주머니에는 항상 무언가가 들어있다. 꼬깃꼬깃 접힌 종이, 누군가의 단추, 낡은 동전, 그리고 가끔은 식당에서 몰래 가져온 빵 조각. 왜 그는 그런 것들을 모으는 걸까? 어쩌면 그것들이 그에게는 과거와 연결된 유일한 고리일지도 모른다.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실제로 존재한다고 확신할 수 있는 물건들.


밤이 되면 그의 방황은 더욱 심해진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리면, 그의 불안은 증폭된다. 마치 어둠 속에서 자신이 완전히 사라질 것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간호사들은 그를 침대에 눕히려 애쓰지만, 그는 계속해서 일어나려 한다. "집에 가야 해... 늦었어... 기다릴 거야..." 누가 그를 기다리고 있을까? 아니면 그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그를 관리하는 관리인들은 노인을 피해 숨기기에 바쁘다. 하루에도 수십 번 같은 질문을 하는 노인, 항상 배가 고프다고 하는 노인, 항상 무언가 필요하다고 손을 내미는 노인. 그들에게 노인은 때때로 부담스러운 존재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오늘은 그 노인이 자리에 누워 구성진 노랫자락을 뽑으신다.

십 년 전, 이십 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또렷한 목소리. 노래 속에는 그의 인생이 담겨 있다. 사랑과 이별, 기쁨과 슬픔, 그리고 오래된 그리움. 노래를 부르는 노인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투명한 물방울이 주름진 뺨을 타고 내려온다.  


노인: "그만 쳐다 봐, 이 사람아."


관리자: "어르신, 노래 잘하시네요."


노인: (한참을 바라보시더니 눈물을 흘리신다)

그리고 돌아 누우신다.

 오늘은 당신의 모습을 보셨을까? 눈물을 흘리시는 모습에 가슴 한 켠이 무너진다.

잃어버린 자아와의 만남

빗방울이 창문을 타고 계속 흘러내린다. 창밖의 세상은 흐릿하고, 실내는 정적으로 가득하다. 노랠 부르시는 노인의 모습이 참 곱다. 마치 오래된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서정적이고 아름답다. 그가 부르는 노래는 "야화". 그의 젊은 시절 즐겨 불렀던 노래일까?

별빛을 살라 먹고 별빛을 살라 먹고
그 향기 그 힘으로 밤에 피는 너는 야화

서성이던 그 발걸음이 멈추고, 하루종일 무언가를 찾아 헤매던 그 안타까운 눈빛이 잠시 맑아진다. 노래를 부르는 순간만큼은 그의 목소리에 떨림이 없다. 마치 50년 전으로 돌아간 듯 또렷하고 힘이 있는 목소리. 그가 젊었을 때 어떤 모습이었을지 상상해본다. 아마도 마을 노래자랑에서 상을 탔을 법한, 구성진 목소리의 소유자였을 것이다.

노인의 손가락이 이불 위에서 리듬을 타듯 움직인다. 한때는 그 손가락으로 기타를 쳤을까? 아니면 북장단을 맞추었을까? 주름진 입가에 살짝 미소가 번진다. 그 미소에는 어떤 기억이 담겨 있을까?

"야화... 그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가 생각나는구먼..."

갑작스럽게 또렷해진 목소리에 놀라 그를 바라본다. 그의 눈에는 지금 어떤 풍경이 펼쳐지고 있을까? 어쩌면 1970년대의 어느 다방일지도 모른다. 하얀 블라우스를 입은 젊은 여인이 앉아 있고, 한 켠에서는 통기타를 치는 젊은이가 '야화'를 부르고 있다. 그리고 그 노래를 들으며 처음 만난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친다.

"영순이가 좋아하던 노래였어... 항상 틀어달라고 했지..."

그의 목소리가 살짝 떨린다. 영순. 아마도 그의 아내였을까? 복도를 서성이며 부르던 그 이름의 주인공. 그녀는 이 노래를 들으며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아마도 눈을 살짝 감고 미소 지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그 모습을 바라보며 사랑을 느꼈을 것이다.  

노인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처음에는 천천히, 그리고 점점 더 빠르게. 마치 오랫동안 막혀있던 감정의 댐이 무너지듯. 그 눈물 속에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 젊은 날의 사랑, 결혼 후의 행복, 아이들을 키우며 느꼈던 기쁨과 고통,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이별의 아픔까지.


비가 그치고, 저녁 노을이 창문을 붉게 물들인다. 

마치 오늘의 모든 슬픔을 씻어내고 새로운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것처럼. 그 붉은 빛이 노인의 얼굴을 비출 때, 그의 얼굴은 한순간 젊음을 되찾은 듯하다. 주름 사이로 비치는 청년의 얼굴. 잠시나마 그는 자신을 되찾은 것일까?

무엇이 노인을 망각의 세계로 안내하였을까? 그리고 무엇이 노인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게 하였을까? 어쩌면 그 노래가 그의 영혼을 잠시 과거로 데려갔는지도 모른다. 그가 젊고 건강했던 시절, 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고 거닐던 시절, 꿈과 희망으로 가득했던 시절로.

노래가 끝나고, 노인의 눈에서 무언가가 스쳐 지나간다. 마치 안개가 걷히는 것처럼. 그리고 그 순간, 그는 침대 옆에 서 있는 나를 바라본다. 정확히 나를. 그의 눈에는 혼란이 아닌, 또렷한 인식이 담겨 있다. 그는 나를 '간호사'나 '관리자'가 아닌, 한 사람으로 보고 있다.  

노인: "그만 쳐다 봐, 이 사람아."

관리자: "어르신, 노래 잘하시네요."

노인: (한참을 바라보시더니 눈물을 흘리신다)


그의 말 "그만 쳐다 봐, 이 사람아"에는 어떤 감정이 담겨 있을까? 부끄러움? 자존심? 아니면 자신의 약해진 모습을 타인에게 보이기 싫은 마음? 어쩌면 그는 내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는지도 모른다. 한때 강하고 당당했던 사람이, 이제는 침대에 누워 노래를 부르며 과거를 그리워하는 모습으로.

그리고 그 순간, 그는 현재의 자신과 과거의 자신이 마주하는 충격적인 경험을 했을지도 모른다. 젊고 건강했던 자아와, 이제는 기억을 잃어가는 노인이 된 자아 사이의 만남. 그 만남은 아프지만, 동시에 치유의 순간일 수 있다. 잠시나마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무엇을 사랑했는지 기억하는 순간.

그리고 그 짧은 자아의 재발견 이후, 그는 다시 돌아누운다. 마치 그 순간의 명료함이 너무 강렬해서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듯이. 그는 다시 자신만의 세계로 돌아간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과 다르다. 그의 얼굴에는 평온함이 깃들어 있다. 마치 잠시나마 자신을 되찾은 안도감과, 사랑했던 사람들을 기억해낸 따뜻함이 함께 머무는 것처럼.


우리 모두는 부여 받은 하루 24시간을 그저 흘려 보내기도 하고, 소중하게 감싸 안기도 하고, 원망으로 가득 채워 누군가를 미워하기도 한다. 시간이라는 공평한 선물 앞에서도 사람마다 그것을 대하는 방식은 다르다. 어떤 이는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의미를 채우지만, 어떤 이는 그저 보내야 할 짐처럼 여긴다.

하지만 보라. 똑같은 시간 속에서 살아가지만 나를 잃어 버리고, 어른으로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하지 못한 채 낯선 누군가에게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시간을 어떻게 인식할까? 아침이 오고, 점심이 오고, 저녁이 오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얼마나 길게 느껴질까?

오늘 노래를 부르던 노인에게 시간은 어떻게 흘러갔을까? 그가 눈물을 흘리며 바라본 것은 창밖의 풍경일까, 내 모습일까, 아니면 자신의 모습일까? 어쩌면 그는 잠시나마 자신을 되찾았는지도 모른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한 순간 그의 의식 속에서 만났을지도 모른다.

우리도 그들과 함께일 수 있다는 가능성은 언제든지 열려 있다. 우리 중 누구도 기억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의 이름을 잊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 인생이라는 긴 여정에서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의지해야 할 손길을 필요로 하게 될지도 모른다.

감사의 시간, 기억의 가치

저녁이 깊어가며, 요양원의 불빛이 하나둘 꺼져간다. 노인은 이제 깊은 잠에 빠졌을까? 아니면 여전히 과거의 기억 속을 헤매고 있을까? 그의 꿈속에서라도 그가 온전한 자신을 만나길 바라는 마음이 든다.

오늘 내가 살아 있음에 감사하기보다는, 오늘 내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를 하자. 오늘 내가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감사보다는, 내 손으로 밥을 먹을 수 있음에 감사하자. 오늘 내가 옷을 입고 걸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보다는, 나 스스로 그 모든 것들 해결할 수 있음에 감사하자.

나에게 피맺힌 한을 심어준 사람보다는, 나에게 사랑을 준 사람을 기억하자. 지금 이 순간 난 내가 글쟁이임이 감사하다. 한 편의 시를 쓸 수 있는 비를 주심에 감사하자.  

시간이 흘러 집으로 가는 손잡이를 잡는 순간까지, 자리에 누워 눈물 흘리며 노래를 부르던 노인이 했던 말 "이 사람아 그만 쳐다봐"이 자꾸만 머리 속에서 유영을 한다.

그는 왜 그렇게 말했을까? 부끄러워서? 아니면 자신의 모습을 알아보는 순간의 충격 때문에? 어쩌면 그는 내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는지도 모른다. 늙고 연약해져 침대에 누워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것은 그에게 견디기 힘든 현실이었을 것이다.

노인은 지금도 울고 계실까? 글을 쓰는 이 시간, 노인이 사무치게 그립다. 그의 노래 소리가, 그의 눈물이, 그의 말 한마디가 내 마음속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어쩌면 나는 그를 통해 나의 미래를 보았는지도 모른다. 또는 내 부모님의 모습을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남겨진 노래, 흐르는 눈물  

밤이 깊어가며 창밖을 바라본다. 빗방울이 그친 자리에 별들이 하나둘 빛나기 시작한다. 노인이 부르던 노래가 자꾸 귓가에 맴돈다. "별빛을 살라 먹고... 밤에 피는 너는 야화..." 그 노래를 부르던 노인의 눈물이 내 마음에 스며든다.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잊어가고 있을까? 오늘의 행복, 어제의 슬픔, 그리고 내일의 약속들. 모든 것이 언젠가는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 내가 느끼는 감정만큼은 진실하다.


노인을 바라보며 느꼈던 그 마음의 떨림, 그것은 삶의 유한함에 대한 두려움일까? 아니면 인간의 존엄성이 상실되어 가는 모습에 대한 슬픔일까? 어쩌면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 오는 연민과 사랑일지도 모른다.


오늘 밤, 나는 그 노인을 위해 작은 기도를 올린다. 그가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고 있든, 그의 마음에 평화가 깃들기를. 그가 잃어버린 기억들 대신, 따뜻한 손길과 위로가 함께하기를. 그리고 언젠가 그가 다시 자신을 온전히 만날 수 있기를.


내일 아침, 다시 그를 만나면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어떤 위로가 그에게 닿을 수 있을까? 아마도 말보다는 그저 함께 있어주는 것, 그의 노래에 귀 기울여주는 것, 그의 눈물을 존중해주는 것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참을 수가 없도록 이 가슴이 아파도, 우리는 서로의 눈물을 닦아주며 살아간다. 오늘은 내가 그의 눈물을 보았지만, 언젠가는 누군가가 나의 눈물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이 인생이라는 긴 여정의 아름다움이자 슬픔이 아닐까.


야화 / 사랑의 하모니


별빛을 살라 먹고 별빛을 살라 먹고
그 향기 그 힘으로 밤에 피는 너는 야화
무량한 너의 기도 내 맘을 달래주고
화사한 너의 웃음 가슴에 남았는데


난 이제 어디로 가나
난 이제 어디로 가나
바람이 부는데로 오늘도 흔날리며
끝없이 기다리는 밤에 피는 너는 야화


삶이라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그 장면에서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후회하고, 무엇을 그리워할까? 노인의 눈물에서 나는 인생의 본질적인 아름다움과 슬픔을 동시에 보았다. 기억을 잃어가는 과정에서도 남아있는 감정의 진실함, 그것이 우리 모두가 끝까지 지켜야 할 인간성의 핵심이 아닐까. 참을 수가 없도록 가슴이 아파도,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고, 서로의 노래에 귀 기울이고, 서로의 눈물에 공감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서로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선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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