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킷 18 댓글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봐요

마지막 한 숨, 긴 호흡을 그는 몰아서 쉬고 있다

by 시가 별빛으로 눕다 Mar 21. 2025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어요, 사랑한다고
당신이 잠든 밤에 혼자서 기도했어요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어요, 행복했다고
헤어지는 날까지 우리는 하나였다고


- 김창완,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어요' 중에서

인생의 마지막 순간, 우리는 무엇을 말하고 싶을까. 사랑했다고, 행복했다고, 아니면 미안했다고. 말하지 못한 채 떠나는 이들과, 그들을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강이 흐른다.

돌아온 노인의 침묵  

겨울 저녁, 요양원 309호실


병원에서 돌아온 노인은 콧줄과 소변줄과 함께였다. 창백한 얼굴, 깊이 패인 볼, 그리고 희미해진 눈빛. 그는 종종 밥의 절반을 흘리면서도 항상 혼자서 식사하기를 고집했던 분이셨다. 자존심이 강했던 걸까, 아니면 타인에게 짐이 되기 싫었던 걸까.


조용히 노인의 방에 들어가 그를 바라보고 있는데, 옆자리 침대의 노인이 내게 속삭인다. "곧 돌아가신대요. 옷이라도 챙겨 입혀서 입고 가게 해주세요." 그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마치 아득한 바다 밑바닥으로 가라앉는 돌처럼.

가을의 마지막 나뭇잎이 떨어지듯, 인간의 생명도 언젠가는 땅으로 돌아간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우리도, 결국은 모두 그 마지막 길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달리고, 때로는 걷고, 때로는 비틀거리면서.

309호실의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희미한 오후 햇살이 노인의 얼굴을 비춘다. 그 주름진 얼굴에는 삶의 모든 계절이 새겨져 있다. 봄날의 설렘, 여름의 뜨거움, 가을의 풍요, 그리고 지금, 겨울의 고요함.

침묵 속의 대화

노인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번 생에서 만난 모든 것들과 어떤 이별을 하고 있을까. 눈을 감고 계시지만, 그의 마음은 지금 이 순간에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는 삼십대 초반, 봄날의 산책로에서 처음 만난 그녀를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벚꽃이 흩날리던 그날, 그녀의 미소는 세상의 모든 꽃보다 아름다웠다. 그들의 첫 데이트, 첫 키스, 그리고 작은 교회에서의 결혼식. 서투른 남편이었을까. 지금 와서 그녀에게 미안했던 모든 순간들에 용서를 빌고 있을지도 모른다.  

노인의 마른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직인다. 마치 누군가의 손을 잡으려는 듯. 그의 입술이 희미하게 떨린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누구에게 말하고 싶은 걸까.


"사랑했소... 행복했소..."


너무 작아서 거의 들리지 않는 속삭임. 하지만 그 말은 분명히 누군가를 향한 것이었다.

본인의 목숨보다 귀하게 여겼던 자식들에게 잘 살라고 속삭이고 계실까. 첫 아이가 태어났을 때의 벅찬 감동, 아이의 첫 걸음마를 지켜봤던 순간, 학교에 입학하던 날 아이의 작은 손을 잡고 걸었던 기억. 그 모든 순간이 물처럼 흘러가는데, 그는 지금 그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 것일까.

살아온 어느 날 노인을 힘들게 했던 사연들을 용서하고 계실까. 삶은 결코 순탄치 않았을 것이다. 사업의 실패, 배신, 오해, 후회, 그 모든 것들이 그의 마음속에 상처로 남아있을 텐데. 지금 그는 그 상처들을 하나씩 어루만지며 치유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고비 고비 순간 순간이 불꽃 같았으리라. 인생이란 결국 그런 것이 아닐까. 불꽃처럼 강렬하게 타오르다가, 어느 순간 바람 한 줄기에 꺼져버리는. 그 짧은 순간 동안 얼마나 밝게 빛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닐까.  

노인의 두 귀에 대고 이름을 크게 불러 본다.


"어르신... 저예요. 들리세요?"


미동이 없다. 그저 희미한 숨소리만이 방 안을 채운다. 마치 가을 끝자락의 낙엽이 바람에 살랑이는 소리처럼 가볍고 연약한.

 떠나는 당신에게

가슴에 손을 얹고 기도를 드린다. 종교는 달랐을지 모르지만, 이 순간만큼은 모든 경계가 무의미해진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 한 영혼이 평안히 떠나기를 바라는 마음뿐.  


"사랑이 많으신 주님
당신의 어린양이 당신 곁으로 가고 있습니다
부디 당신 품에 안기는 그 순간까지 동행하여 주시고
가는 길 편안하게 가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하지만 다시 또 생각이 난다. 노인이 하나님을 믿었을까? 아니다, 영접을 하게 해야지. 다시 노인의 방에 들어가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한다.

"어르신, 아멘하세요."

돌아 나오는 내 모습이 참으로 처량하다. 어쩌다 종교가 이렇게 타락하여 한 인간의 마지막에도 편안하게 기도하며 보내 드릴 수 없나. 차가운 방, 좁다란 침대에 누워 지켜주는 이 하나 없이 외롭게 마지막 호흡을 하는 노인. 그저 관리하는 선생님들만 애타는 마음으로 오고 간다.

오늘을 살아가는 당신, 

너무 치열하지 말자. 

너무 많이 담아 두지 말자. 

너무 두 손 가득 잡지 말자. 

너무 많이 걷지도 말자. 

너무 많이 뛰지도 말자. 

조금만 두 손을 펴 보자. 

조금만 천천히 속도를 늦춰 보자. 

조금만 숟가락도 비워보자. 

그리고 나와 인연을 맺었던 그들을 뜨겁게 사랑하자. 

마지막 순간에 이별의 시간이 길지 않기 위해서.

노인을 향한 기도  

어르신의 이승과의 이별이 짧기를 기도합니다.
마지막 가시는 길이 꽃길이기를 기도합니다.
살아오신 모든 날들의 아픔이 치유되기를 기도합니다.
만나신 모든 이들과의 인연이 축복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흘리신 모든 눈물이 보석으로 빛나기를 기도합니다.
걸어오신 모든 길이 의미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이제, 평안히 쉬시기를 기도합니다.


돌아서 나오는 나의 뒷모습이 아름답기를. 

이젠 더 이상 투사가 되지 말자 하고 뛰는 가슴을 토닥토닥 진정시키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어르신, 편안히 잘 가세요.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그대 떠나는 곳
내 먼저 떠나가서
그대의 뒷모습에 깔리는
노을이 되리니


- 정호승 시, 이동원 노래 '이별노래' 중에서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에서, 우리는 모두 같은 질문을 던진다. 내가 사랑한 만큼 사랑했는가.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베풀었는가. 내가 살아야 했던 만큼 충실히 살았는가. 그 질문들에 대한 답은 각자 다르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 모두 언젠가는 떠나는 그대가 된다는 사실이다. 그날이 오기 전에, 오늘 하루만이라도 조금 더 깊이 사랑하고, 조금 더 진심으로 감사하고, 조금 더 온전히 현재에 머물러 보는 건 어떨까. 그것이 떠나는 그대에게, 그리고 남겨진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 아닐까.

이전 23화 늙으면 들판의 나무보다 못해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