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답이 먼저 오는 세계

by 유영

"삶은 답을 내기 위한 풀이가 아니라, 질문을 품은 채 살아내는 과정 그 자체다."




우리는 언제부터 질문을 멈추었을까.

정확히 말하면, 언제부터 '질문을 하던 나'가 사라졌을까.


아이들은 세상을 만나는 첫 번째 방법으로 '질문'을 선택한다. 왜 바다는 파랄까, 왜 나는 여기 있을까, 왜 사람은 늙을까. 질문은 지식이 아니라 본능이다. 물라서 묻는 것이 아니라, 알고 싶은 마음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넘칠 때 터져 나오는 힘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라면서 점점 묻는 법을 잃는다. 그건 단지 질문을 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질문이라는 방식 자체가 지워진다. 우리는 이미 누군가가 정해놓은 '답'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 답은 빠르고, 간결하며, 외워야 하는 것들이었다. 삶은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외워야 할 목록이 되어버렸다.


질문 없는 세계는 표면적으로는 효율적이고, 분명하고, 간편하다. 모든 것이 규격화되고, 정리되고, 측정된다. '왜?'를 묻는 시간은 비효율이고, 그 시간 속에서 흔들리는 감정은 방해물이다.

그래서 우리는 점점 생각하지 않는 삶을 능력이라 부르게 되었다. 정답을 외우고, 그대로 실현하는 것을 성실함이라 칭한다. 그러나 그 안에서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대답하는 인간이 되었다.

묻기 전에 정해진 길을 외우고, 질문 없이 답을 말하는 존재. 마치 모든 말은 하나의 결론을 위해 쓰이고, 모든 시간은 하나의 목적을 향해 흘러야 하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는 점점 정해진 문장 속에 나를 끼워 넣는 방식으로 살아간다. 이름 있는 학교, 안정된 직장, 타인이 부러워할 만한 일상. 그 모든 답은 외부에서 왔다.

나는 그 답을 이해한 적도 없고, 정말 원했던 적도 없지만, "다들 그렇게 하니까"라는 이유로 그 답을 수행한다. 우리는 질문을 버린 대가로, 더 이상 나를 묻지 않게 되었다.


질문이 사라진 곳에는 정답만이 남는다. 하지만 그 정답은 언제나 타인을 위한 정답이다.

"당신은 어떤 삶을 살고 싶나요?"보다 "어떻게 해야 성공할 수 있나요?"가 훨씬 더 많이 회자되는 이유는, 우리가 이미 질문보다 결과를 중요시하는 구조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점점 질문 없는 존재가 되어 간다. 질문이 없다면, 방향도 없다. 방향을 잃은 삶은 결국, 주어진 길만 걷게 된다. 의지는 사라지고, 남는 건 움직이는 기계일 뿐이다.

질문은 문제를 만들지만, 정답은 문제를 덮어 버리니까.




학교.png


우리는 질문 없는 세계에서 너무 오래 살아왔다. 질문을 잃은 사회는 정답을 신앙처럼 받아들인다.

그 결과, 우리는 당연하다는 듯이 열여덟의 인생을 한 줄로 세운다. 모두가 똑같은 방식으로, 똑같은 방향으로, 대학이라는 정답을 향해 나아간다.

대학은 더 이상 배우기 위한 공간이 아니다. 대학은 '괜찮은 인생'의 자격을 증명하는 통과의례가 되었다. 그리고 그 정답에 도달하기 위한 모든 길은 사교육이라는 시스템에 종속된다. 누군가의 질문은 학원 시간표에 의해 잘리고, 어떤 이의 생각은 모의고사 성적에 맞춰 줄을 선다. 자유는 없다. 그저 누가 더 빠르게, 정확하게 정답에 도달하느냐만 중요하다.


그렇게 질문은 사회로 나가기 직전, 마지막 관문 앞에서 조용히, 완벽하게 꺾인다.

날개를 펴기 전에 꺾이는 법부터 배우고, 바람을 알기도 전에 그 바람에 굴복하는 법을 배운다.

꿈은, 허락받기 전에 먼저 포기하는 법을 배운다.




정답이라는 개념은 누군가에게는 구원일 수 있다.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따라야 할 길이 있다는 것은 안정과 평화를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정답이 단 하나의 길만을 허용할 때, 그 길에서 벗어난 모든 삶은 무가치하게 취급된다. 질문은 불편한 것이 되었고, 의심은 예의 없는 태도로 여겨졌으며, 속도에 뒤처지는 삶은 곧 '루저'로 불렸다. 그 구조는 지금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삶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다. 정답은 반복을 낳고, 삶은 늘 예외를 낳는다.


질문은 본질을 묻는다. 그리고 그 본질을 묻는다는 건, 세상이 그려준 선 밖으로 발을 내딛겠다는 결연함이다.

그래서 질문은 언제나 위험하다. 균열을 내고, 질서를 어지럽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체계는 항상 질문을 거부한다.

정답이 먼저 오는 세계 속 인간은 하나의 결과물로 규정된다. 하지만 인간은 그렇게 단순한 방식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나 과정 속에서 겪고, 흔들리고, 또 바뀌며 자신을 알아간다.

그렇기에 살아 있다는 것은, 여전히 답을 찾지 못했다는 뜻이다.

삶은 질문을 안고 흐르기에.


지금 다시 질문하고 싶다. '나는 왜 살아가는가.'

이 질문은 이미 수백 번 넘게 던졌던 것이지만, 오늘의 나는 또 다른 의미로 다시 품는다.


질문은 정답을 이기지 못할지 모른다. 그러나 사라지지 않는다.

정답은 멈추게 하지만, 질문은 끝내 걸어가게 만드니까.

그래서 결국, 내가 이 글을 걷게 된 것처럼.

keyword
이전 06화진짜 변화의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