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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디너리페이퍼 Aug 04. 2024

분별과 불이

2020년 9월 #2

오랜만에 집에서 차분하게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습니다.

오늘 낮에는 역시나 오랜만에 엄마밥을 먹고 왔구요.

연극계에 퍼진 코로나로 조심스러워 집에 가지 않았고, 출장도 있었으니까요. 엄마밥은 특별하지 않아도 특별하고, 평범해도 든든합니다. 그 무엇보다. 이런 감사함을 40년을 살고난 이후에 점점 깨닫게 되니, 그나마 더 늦지 않아 다행입니다.


오늘은 템플스테이 중 법문좌선 시간에 스님에게 들은 시를 한 수 들려 드리려고 합니다.

400여 년 전 이곳에 기거하셨던 소요선사께서 지으신 시라고 합니다.

개개면전 명월백(얼굴 하나하나마다 달처럼 환한 빛이 있다)

인인각하 청풍취(사람사람마다 발아래 맑은 바람이 분다)

타파경내 무영정(거울을 깨서 그림자 자취를 없애니)

일성제조 상하지(새 한 마리 노래하니 가지 위에 꽃이 핀다)


사람마다 동물마다 내뿜는 환한 빛이 있습니다.

장소마다 그 장소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매 순간 최선을 다하고 있으므로 환한 빛을 내뿜는다 하구요. 차별 없이 즉,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하지 말아야 낱낱이 놓치지 않고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사람마다 행동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분별심으로 본다면 다름을 찾으려 하고 시기하게 된다고 합니다. 좋은 것보다 나쁜 것이 쉽게 보이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잘하고 못하는 결과보다 그 사람의 의지를 보아야 한다, 개개의 사람을 인정하고 본다면 사람을 살리게 된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거울을 보면서도 실제 내 얼굴이 아닌, 보고 싶고 기대하는 얼굴을 본다고 합니다. 나에게, 다른 사람에게 갖는 기대감을 매 순간 깨뜨려야 한다고 합니다. 과거의 모습을 현재 눈앞의 사람에게서 찾으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그림자(과거)마저 깨뜨려버려야 본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말 한마디를 건네니 그 사람이 환하게 웃는다.

내 한마디에 신명이 나고, 행복해합니다. 도인의 안목은 산을 옮기거나 하늘을 나는 것처럼 특별한 것이 아니라, 현재에 있는 것을 어떻게 보느냐에 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수행은 ‘기대감’을 깨어 내 행복을 찾고, 타인도 꽃피울 수 있기를 기대함이라고 합니다.


템플스테이 중 불이(不二)라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불이(不二)라 함은 상태 분별이 없고 절대 차별이 없는 세계 또는 그런 인식입니다. 즉, 여기서 분별은 익숙한 사리분별에서의 긍정적 의미가 아니라, 구분하고 구별하여 편을 나누는 부정적 의미입니다. 때문에 대상을 볼 때 불이(不二)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평범하지만 인상적이었던지 다녀온 이후 순간순간 어떤 판단을 하려 할 때, 평가하려 할 때 불이(不二)라는 단어를 되새김질하게 됩니다. 아직 돌아온 지 며칠 되지 않아 언제까지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불교가 기독교나 천주교와 같이 종교적 기능을 하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 특별히 종교로서의 불교에 대한 인식은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특별히 선호하는 바도 거부감도 없습니다.

오히려 세상과 나에 대한 인식이나 철학적 차원에서의 불교가 조금 더 친근한 것 같습니다. 뭐, 그 깊은 것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말입니다. 고등학교 때 심학(心學)이라는 수업이 일주일에 1시간씩 있었는데, 처음에는 종교적 차원에서의 불교 수업이라는 인식이 있었지만 실제로는 제목 그대로 마음을 공부하는 수업이었고 내용이 기억은 안나도 수업에 대한 좋았던 인상을 가지고 있는 탓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주지스님과 법문좌선을 하면서 불현듯 그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나 스스로 뿐 아니라 사회나 조직에서 나에게 요구하는 기능과 역할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 안에서 무아, 무념, 무주…를 얼마나 실천하면서 살 수 있는가.

사람들과 떨어진 산중에 살면서 수행과 수련을 통해 나 자신의 성장과 행복을 구한 뒤, 그 다음은… 그 다음은… 무얼까.

스님에게 여쭙고 싶었는데 묻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나의 말 한마디가, 나의 행동 하나가 나 그리고 주변을 잠깐이나마 미소 지을 수 있게 한다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가 싶습니다.


그나저나 출장 후 첫 출근을 해서 사무실 저 멀리 구석 자리를 넘어다 봤습니다. 한번, 두 번.

그러다 깨달았습니다. 아, 이제 저 자리가 아니구나.

자리를 옮긴 후 변화된 1주일의 시간이 어땠는지 안부를 묻고 싶었으면서도 차마 하지 못하고,

정작 몸의 기억은 물리적 실체를 기대하며 저 파티션 너머 그대가 있던 자리를 바라다봅니다.


많이 웃고, 다음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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