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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디너리페이퍼 Aug 02. 2024

저, 퇴사하려구요 라고 말하기 100일 전

“그런데 퇴사를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어요?” 

퇴사 후 가장 자주 만나게 된 친구 중 한 명인 H가 얼마 전 물었다. 

글쎄 무엇이었을까. 과연 하나의 계기가 있기는 했던 걸까. 

10년을 훌쩍 넘겨 일한 곳에서의 시간을 마무리하고자 결정하는데 고작 단 하나의 이유뿐이었을까, 아니 정말로 어느 하나가 결정타가 되어 나에게 날아든 것이었을까.

하나든 손에 꼽을 만한 숫자든 아마 있었을 거다. 그러지 않고서야. 


사람들은 참 다양한 이유로 퇴사를 결심한다. 

일이 안 맞아서, 일이 너무 많아서 또는 일이 너무 적어서, 경제적인 문제로, 사람 간의 갈등 때문에 또는 좋은 사람이 없어서, 과도한 감정적 소모 때문에, 건강상의 문제로, 권고를 받거나 그럴 수밖에 없는 조직적 또는 가정적 환경 때문에, 그리고 다음 단계로의 도약과 성장 등 커리어 관리를 위해, 변화 또는 보다 적극적인 전환을 위해, 휴식을 위해, 학업을 위해. 


나의 동료들도 그랬다. 

이유는 각양각색이지만, 분명한 건 지금 그 사람이 필요로 하는 무언가를 그 조직에서 찾을 수 없음을 깨달았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조직이 개인을 잡아끌 만큼의 강력한 훅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인의 필요가 현재의 결핍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대학로에서 일을 시작한 나는 여전히 공연하는 집단을 회사나 직장이라고 말하는 것이 어색하지만, 어쨌든 직장이 좋고 나쁨은 큰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여러 가지 객관적인 조건을 들어 시쳇말로 '신의 직장'이라고 꼽히는 곳도 있고, '3D 업종'이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그건 모두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다. 더욱이 좋은 곳이라고 좋기만 한 것도 아니고 나쁜 곳이라고 나쁘기만 한 것도 아니다. 그저 나와 조직이 얼마나 맞느냐의 관계일 뿐이지 않을까. 


퇴사를 결정하고, 길에서 우연히 만난 원로 선생님에게 퇴사 소식을 알리자 그분의 첫 말씀은

"아니 그 좋은 회사를 왜!"였다. 

"왜?"가 아니라. 

공연을 계속해서 하고 안정적으로 월급이 나오는 이곳이 오래도록 연극일을 해오신 그분에게는 좋다 판단할 만한 곳이었지만, 그리고 나에게도 그동안 좋은 곳이었음이 확실하지만, 다만 그 시점의 나에게는 그걸 넘어서는 필요가 있었을 뿐이다. 


되돌아보면 퇴사라는 단어의 처음은 사소한 것에서 시작되었던 것 같다. 

그 작은 균열은 지금으로부터 약 1년 전으로 더듬어 올라간다. 


출발만 남겨둔 상황에서 코로나19로 결국 취소되었던 가족 여행이 몇 년 만에 성사되었다. 

이미 연초에 직원들과 업무일정을 고려해 휴가를 조율해 두었기 때문에 무리 없으리라 생각했지만 ‘변수는 언제나 있다’는 법칙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등장했다. 그래도 갔다. 가족들과의 약속과 동료들의 지원 덕분에 그리고 무엇보다 나 때문에. 이미 안팎으로 지속되는 변수들로 심신이 지쳐있는 상태였다. 올해의 남은 시간을 이 상태로 끌고 나가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였다. 그래서 약간의 피신이 필요했다. 


이쯤 되면 변수를 컨트롤하지 못하는 조직과 사람들의 문제 아닌가 싶지만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보니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사소한 문제든 심각한 사건사고든 결국은 위기관리 이슈인데, 아무리 경험을 하고 신경을 곤두세워도 발생하는 위기 자체를 사전에 차단하지는 못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여기서 등장하는 자책, 내 능력 탓인가. 그리고 발생하는 사안 자체보다는 과도하게 감정적으로 타격을 받고 스트레스를 받는 나의 성향 또한 내가 지쳐가는 것에 큰 몫을 했다는 것을 안다. 


첫날, 공항에 도착해 숙소로 이동하는 순간부터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이는 그 많은 변수들과 달리 변하지 않는 모수와 같다. 가끔, 어쩌면 꽤나 자주 그리고 오랫동안 나를 필요로 하는 상황에 취해 살았던 것 같다. 처음엔 나의 일이 원래 이런 거라고, 경력이 쌓이면서는 나의 역할이 이런 거라고 생각했었고, 힘들다고 툴툴거리면서도 어느새 마음 깊은 곳에는 내가 필요하다는, 내가 책임지고 해결해야 한다는 심리적인 만족감과 성취감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있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다. 책임감인 줄 알았으나, 내재된 자만일지도 모를.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조직에서 나의 역할은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 수 있다(사람들이 모여 일하는 조직의 장점이기도 하다)고 머리로는 학습하고 입으로는 얘기했지만, 나와 우리의 일은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마음의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바로 ‘그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서, 정작 그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에 몸과 마음의 쉼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잘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날은 회사에서 오는 연락에 그렇게도 짜증이 났다.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일을 미루다가 결국은 내 시간을 야금야금 뺏어가는 휴대폰의 진동에 진저리가 났다. 그럼에도 열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아니었다. 


공항과 도심을 연결하는 열차에 내려 숙소에 짐을 놓고 늦은 점심식사를 하러 나가는 길, 퍽이나 긴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불현듯 주위의 모든 것이 낯설고 덜컥 겁이 났다. 

그리고 에스컬레이터 한 칸 아래 선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응?”

“나 퇴사해야 할 것 같아. 그리고 여행 가야 할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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