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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디너리페이퍼 Aug 21. 2024

이런 건 어쩌면 가을 탓인지도

2020년 10월 #4

월요일 밤입니다.

지난주 일요일 퇴근 후 시작해서 월요일 하루종일 ‘이번생은 처음이라’는 드라마 16부작을 모두 보고, 모니터를 너무 오래 봐서 띠잉한 머리로 출근한 화요일 점심에 책을 두 권 주문했습니다. 정현종 시인의 시집 [섬], 박준 시인의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이라는 산문집입니다. 드라마에 인용된 구절이 너무 좋아서요. 

배송받고, 집에 가져왔는데 오늘에서야 첫 장을 열어 보았습니다. 두 권 모두 제가 사고 싶었던 버전은 절판되고, 새로운 에디션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저는 새로운 에디션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페이퍼백을 좋아하는데, 책을 새로 낼 때는 보통 하드커버로 내더라구요. 더 오래 간직하라는 이유에선지, 비용을 타당하게 올리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새롭게 하기 위해 무언가를 더해서 내는데… 그닥 맘에 들지 않더라구요. 내지까지 두꺼운 종이로 나오는 경우도 많고.


방문객   

정현종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함께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많이 유명한 시라고 하더라구요.

누구는 이 글을 읽기만 해도 눈물이 난다고 하고, 책의 띠지에는 국민 애송시라고 적혀 있습니다. 

저는 드라마를 통해 처음 접했는데, 드라마가 아닌 글을 처음 접했더라면 어떤 느낌일까… 상상해 보았습니다. 사실 저는 이미 드라마로 인해 오염된 감성이니까요. 시집에 있는 다른 글을 몇 편 더 읽었는데, 아직 방문객만큼 다가오는 글은 없습니다. 드문드문 펴보자… 생각하고 덮었습니다.


그리고 산문집을 폈습니다.


새벽에 걸려온 전화   

박준


“슬퍼서 전화했다. 가장 슬픈 일은 장소가 없어지는 일이다. 그러면 어디에 가도 그곳을 찾을 수 없다. …”


장소가 없어지는 일이 저에게 슬픈 것은 저의 지난 시간과 기억이 가차 없이 지워졌다는 느낌 때문입니다. 

그런 경험을 끊임없이 지금까지도, 간혹 합니다.

오래전 지인들과 자주 갔던 강남역의 봉추찜닭, 

대학시절 친한 언니오빠들과 수시로 드나들었던 강남역 포켓볼장과 예술의 전당 앞 카페,

요즘 말로는 썸을 타던 첫 남자친구와 처음으로 만나 영화를 봤던 강변역 테크노마트 영화관, 

헤어진 사람이 한 달 뒤 찾아와 울었던 집 앞 눈 덮인 놀이터,

친구들과 축제가 끝난 뒤 밤새 놀려했으나 결국 밤이 녹록지 않은 시간임을 알고 들어갔다 밤새 두려움에 떨며 교대로 문고리를 잡고 있었던 학교 앞 비디오방, 

대학시절 대부분의 점심을 해결했던 교내 간이매점…

어딘가는 어느새 그곳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되고,

어딘가는 이제 거의 가지 않는 동선에 존재해 멀어진 그런 장소.

상당히 많은 시간을 보낸 강남역에 요즘은 발을 딛지도 않을뿐더러,

거의 매주 부모님 집에 갈 때마다 버스로 지나가다 보면 낯설기가 그지없습니다.

그냥, 저와는 다르지만,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아니 글이 있다는 사실이 반가웠습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시간의 자욱을 남기는 일입니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다른 날, 기대하지 않은 시간에 보내신 답메일을 읽고, 

문득 이상은의 ‘삶은 여행’이라는 노래가 듣고 싶어졌습니다.

유튜브로 검색해서 듣고 또 들었는데, 정말 아름다운 노래입니다.


한 때 채팅으로 많은 대화를 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어른일 때, 지금 생각하면 그닥 어른도 아닌 것 같지만 세상 진지한 고민을 하고 있다 착각하던 그때 

오프라인으로 알게 된 사람인데, 우연히(?) 온라인을 통해 연결이 되면서 한동안 꽤 많은 대화를 나눴어요.

아마도 물리적인 환경에서 만나는 것이 아닌 데다가, 

개인적으로 많은 그리고 오랜 시간을 알았던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속얘기를 더 스스럼없이 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그렇게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마 그 사람도 그랬을 거예요. 

담담하고, 솔직하고, 따뜻하고, 또 다른 시선을 더할 수 있는. 

타자, 그리고 타인이라는 존재가 그렇게 예기치 않은 위안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해법은 내 안에서 나오겠지만, 그 실마리는 어디서든 주어질 수 있겠지요.

그런 시간이길 바랍니다.


많이 웃고, 다음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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