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_자멸로 이끄는
- 이제 시간이 됐습니다.
- 아… 벌써 그렇게 되었네요..
남자는 보고 있던 서류를 인사팀장에게 넘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들어온 입구 반대쪽 벽 앞에 선 인사팀장이
벽의 중간 부분에 손을 가져다 댔다.
문이 열리길 기다리는 잠깐의 시간 동안
남자는 처음 이 건물에 왔을 때가 떠올랐다.
복도의 벽인 줄 알았던 곳이 문으로 변하는 것을
보고 놀랐던 게 불과 하루 전 일이라는 게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더니..
이젠 전혀 신기하지도 않네..
- 지이잉
벽의 일부분이 뒤로 밀리면서
안으로 통하는 복도가 드러났다.
문이 완전히 열리자
인사팀장이 남자를 한번 바라보고는
먼저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어서 그 뒤를 남자가 따라 걷는다.
- 이 방입니다.
28층 사무실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보는 정상적인 문이었다.
물론 이 문도 그 재질이나 모양은
일반적인 문과는 매우 달랐지만,
어쨌든 누가 봐도 여기가 문이라는 걸 알 수 있도록
겉으로 드러나 보인다는 점에서
지금껏 벽으로 위장한 문들만을 봐왔던 남자의 눈엔
이 문 정도면 지극히 정상적인 문으로 보였다.
문 앞엔 번호가 음각되어 있다.
[16]
남자는 방 번호를 보자마자 주위를 둘러보며
그 의미를 분석해보려 했지만
곧바로 포기했다.
16번 방의 바로 오른쪽 방 문엔 8,
좀 많이 떨어진 왼쪽 방 문에는
13이라는 숫자가 보인다.
어떤 규칙도 찾을 수 없는 방들의 번호다.
이것만으로는,
이 안에 몇 개의 방이 있는 건지
아니면 방의 숫자에 다른 의미가 있는 건지
하다못해 이 방이 16번째 방인지조차
그 어느 것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 강조드렸던 부분들 유념하시고
잠시 후 다시 여기서 뵙겠습니다. 그럼.
인사팀장이 남자의 오른쪽 팔꿈치 부분을
가볍게 치고는 문 중간에 달려있는 손잡이를 돌렸다.
손잡이는 특이하게 배의 조종대와 모양이 비슷하다.
금속 손잡이를 세 바퀴쯤 돌렸을 때
철컥 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다.
메탈 재질의 육중한 문이 열리고
방안을 확인한 남자의 동공이 커졌다.
남자가 들어가고 컨설팅 룸의 문이 닫히자
인사팀장이 크게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
한참 뒤 들이마셨던 숨을 도로 내뱉었다.
- 이젠.. 끝이네..
뜻 모를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되돌아가기 위해 뒤를 돌아선 인사팀장의 몸이
바로 얼어붙었다.
복도 끝 대기실의 문이 열려 있었다.
그리고 그 문 앞에 한 여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을 잃을 것 같지 않던
인사팀장의 얼굴 위로 순식간에
당황스러움이 퍼져나갔다.
-.. 대표님, 오셨습니까..
여자의 앞으로 급히 걸어온 인사팀장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인사팀장의 숙여진 머리만 바라 볼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이진경 대표다.
- …..
인사팀장은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계속 숙이고 있다.
인사팀장의 목 뒤로 땀이 한 방울 흘러내린다.
- 인사팀장님.
이진경 대표가 인사팀장의 직책을 불렀다.
- 네, 대표님.
그제야 인사팀장이 고개를 든다.
- 아직도 쓸데없는 감정이 남아있으신가 봐요.
-.. 아닙니다. 대표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마치 천적이라곤 볼 수 없는 연못에서
자유롭게 유영하다 뱀과 맞닥뜨린 개구리처럼
얼어붙은 인사팀장이 간신히 대답했다.
- 사적인 대화는 내부에서 허용되지 않는다는 규칙,
잊어버린 건 아니실 테고.. 만약 한 번만 더,
좀 전 대기실에서처럼 컨설팅과 무관한 불필요한
대화를 하시면.. 제 권한으로 바로 인사발령을
내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시 컨설턴트로 돌아가고 싶으신 건 아니시죠?
인사팀장님.
- 아닙니다. 그저.. 전담 컨설턴트로 계약을
유도하기 위해 회사에 관한 불안함이나 의심 가는
부분들을 가능한 풀어주려 했을 뿐입니다.
특히, 이번 지원자는 대기실이나 컨설팅룸에 관해
지금 그럴듯한 설명이라도 해두지 않으면
혹시 나중에라도 저 방들의 기능을 짐작할 수도
있지 않을까 우려되어…
- 그런 것 치고는 설명이 너무 조악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팀장님!
어차피 첫 컨설팅이 끝나고 나오면
그런 것들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이 머릿속에 들어오기나 할 것 같아요?
첫 컨설팅 끝나고 돈을 받았는데
전담 컨설턴트 계약을 포기할지도 모르겠다?
이제껏 그런 사람들이 있던가요?
명심하세요.
팀장님의 일은 지원자를 무조건 컨설팅 룸에
집어넣는 겁니다.
한 번만 더 지원자와 사적인 감정 교류가 있게 되면..
그 즉시 보직해임입니다.
- 네. 잘 알겠습니다.
인사팀장의 작지만 확실한 대답을 듣고서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몸을 돌리는 이 대표다.
막 대기실 쪽으로 돌아서서 나가려던 이 대표가
돌연 다시 인사팀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 아 그리고.. 표정 관리 좀 하셔야겠어요.
이번 지원자 앞에선 유독 감정을 잘 드러내시던데..
한 두 번이 아니시더라고요.
뭔가 동질감이라도 느끼시는 건지..
- 대표님! 말씀이...
자기도 모르게 인사팀장이 대표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서며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대표와 눈이 마주치자 이내 말을 흐리며
눈을 바닥으로 떨군다.
- 말씀이 뭐 어떻다는 거죠?
말을 하시려면 끝까지 하세요.
-...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말씀 주신 부분들 각별히 유념하겠습니다.
잠시 인사팀장을 바라보던 대표가
휙 하고 몸을 돌렸다.
그런 대표의 뒷모습을 보며 인사팀장이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허리를 숙이고 있는 인사팀장의 어깨에서
작은 떨림이 느껴졌다.
- 툭
복도의 바닥에 정체를 알 수 없는
투명한 액체가 한 방울 떨어졌다.
*사진출처: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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