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가 가장 조심해야 될 때야.
"우리는 깐부잖아"
넷플릭스 최고 인기 시리즈 ‘오징어게임’의 주인공
오일남 할아버지의 명대사.
사실,
우리 동네에선 '깐부'가 아니라 '가보'라고 불렀어.
오징어게임을 보고 나서야
이걸 동네마다 다르게 불렀다는 걸 알게 됐지.
마치 트램펄린을 지역마다 다르게 부르는 것처럼 말이야.
참고로 우리 동네에선
트램펄린을 '퐁퐁'이라고 불렀는데,
서울 사람들은 '방방'이라고 부르더라.
'깐부'는 일종의 동맹이야.
동맹 중에서도
가장 깊고 찐한 신뢰로 엮인 동맹이라고 볼 수 있지.
각자의 구슬이나 딱지를 공동으로 소유하고
누구든 단독으로 그 전부를 사용할 수 있는
'무조건적 신뢰'가 '깐부'의 핵심이거든.
그래서 아주 친한 친구 사이가 아니면
깐부를 잘 맺지 않아.
깐부를 잘못 맺었다간
내 피, 땀, 눈물로 모은 딱지와 구슬을
친구가 홀랑 다 날려 먹을 수도 있고,
아니면 아예 작정하고 낼름 삼켜버리고
오리발을 내밀 수도 있거든.
잠깐만. 이렇게 말이 나온 김에,
내 옛 깐부에게 안부 인사 하나만 보낼게.
별 개수로 붙든, 숫자 파워로 붙든,
무엇으로 붙어도 모조리 다 이길 수 있는
내 무적 딱지들과!
백다마, 청다마 무늬별로 세밀하게 구분해 놓은
내 소중한 구슬들!
이 모든 걸 몽땅 가지고 하루아침에 이사를 가버린
내 처음이자 마지막 '깐부' 낼름아.
오랜만이야. 잘 지내지?
네 덕분에 난 세상을 조금 일찍 배웠던 것 같아.
기회가 되면,
하늘이 네게도 그런 기회를 주셨으면 좋겠구나.
늘 잘 지내고, 우리 우연이라도 마주치지 말자.
만약, 우연이라도 마주친다면...하아..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아, 이 사람이라면
내 진심을 다 터놓을 수 있겠다.’
싶은 사람을 만날 때가 올 텐데..
그때가
가장 조심해야 될 때야.
순수와 순진의 결정체였던
그 어린 시절에 맺은 깐부도 나를 속이는 마당에,
다 큰 어른이 되어 만난 사람들은 어떻겠어.
물론,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럴 확률은 네가 사원으로 입사해서
그 회사의 사장이 되는 것보다 낮아.
예전에 정말 좋은 형을 사수로 둔적이 있거든.
회사 생활이 익숙지 않았던 내게는
가뭄의 단비 같은 사람이었어.
뭘 해야 될지 몰라 두리번거리고 있으면
긴장해서 쑤욱 올라가 있던 내 어깨에
가만히 손을 올리고
'뭐 하냐, 담배나 하나 피러 가자'
무심한 듯 툭 내뱉으며 데리고 나가던 사람.
회식 자리에서 비싼 안주가 나오면
'야, 박나비! 일로 와서 한 잔 받아.'
라고 불러서 기어이 그 안주를 먹이던 사람.
회식이 끝나고 막차를 기다리고 있으면
택시 타고 가라고 만 원짜리 두 장을
손에 꼭 쥐어 주던 사람.
나는 이런 사수를 만난 게
내 일생에 몇 없는 행운이라 생각했어.
그래서 이 형의 부탁은 만사를 제쳐두고
최우선 순위로 해치웠지.
어느 날,
큰 프로젝트의 비딩에 들어가기 위한
아이디어 회의를 하기 직전이었어.
형이 갑자기 담배나 하나 피자고 부르더라고.
- 후우~ 그래 뭐 좀 생각해 본 건 있어?
- 아, 형. 요즘 정치판에 이게 이슈잖아요.
이걸 이번 프로젝트에 이렇게 적용시키면..
어떠세요? 좀 괜찮을 것 같아서..
- 음... 그래? 그러네. 뭐, 괜찮을 수 있겠다.
의욕에 가득 찬 내 대답이 무색하게
형은 무심하게 답을 하고는 담배만 피워대더라.
그렇게 짧은 대화를 끝내고
우리는 다시 사무실로 들어갔어.
그리고 조금 있다 회의가 시작됐지.
계속해서 몇몇 의견이 나왔지만
대표는 탐탁지 않아 했어.
점점 대표의 얼굴은 구겨져 갔고,
괜히 혀끝을 몇 번 날름거리던 대표의 시선이
형에게로 향했어.
- 아, 네.. 요즘 정치판에 이게 이슈잖아요.
이걸 약간 틀어서 이번 캠페인 슬로건으로
이렇게 변형해서 사용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세부적으로는...
뒷부분부터는 뭐라고 말하는지 잘 들리지 않았어.
다만, 그 형의 말이 끝났을 때.
회의 내내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대표가
처음으로 씨익 웃으며,
'괜찮을 것 같은데? 디벨롭 한 번 해봐'
라는 말만 다시 귀에 들려오더라.
- 박나비, 뭐 생각해 본 거 있어?
회의실을 한 바퀴 둘러보던 대표가
제일 구석에 앉아 있는 날 보며 물어봤어.
- 아! 네! 저! 그! 음! …
한 글자로 이루어진 감탄사는 모조리 내뱉으며
정신을 가다듬어 봤지만,
그 짧은 순간에 다른 아이디어는 도저히 생각나지 않더라.
- 아무리 자유롭게 아이디어 나누는 자리지만,
너무 그렇게 아무 준비도 없이 회의에 참석하는 건
안돼. 아직 이런 아이데이션 회의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겠지만.. 쓰읍… 크리에이티브하고
영~한 아이디어가 나올 거라 기대했는데 실망이네.
- 아... 네, 죄송합니다..
사실,
이 회의보다 내가 더 황당했던 건
이 회의가 끝나고 난 뒤의 일이야.
나는 형이 이번 일에 대해
한 마디라도 해줄 거라 생각했어.
하지만 정말 거짓말처럼 아무런 말이 없더라.
무심하게 시간은 흐르고
형은 아이디어를 디벨롭해서 기획서를 쓰고
이 프로젝트는 우리가 진행하게 됐고,
나와 형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멀어졌어.
나는 아이디어를 도둑맞았다는 사실보다
내가 믿었던 사람과 이런 식으로 멀어진다는
사실이 너무 서글펐어.
그 뒤로도 다른 사람들에게
얼얼하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적은 많지만,
형에 대한 기억은 내가 회사를 몇 번을 옮기더라도
쉽게 지워지지 않더라.
일을 하다 보면 외롭고 힘들 때가 많아.
그럴 때 누군가 옆에 있어주면
그것만으로도 큰 힘이 될 때가 있지.
하지만,
겉으로 느껴지는 그 따뜻한 결에 속아
너의 진심을 모두 맡기진 마.
너의 진심을 가지고 장난치는 사람을
언젠간 만나게 될 테니.
그러니,
목에 칼이 들이밀어진 뒤에야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덜 떨어진 말을 외치지 말고
미리미리 적당선을 잘 지키도록 해.
나는 예외 일 거라 생각하는 일들에
나만 예외가 되는 경우란 거의 없고,
설마 내가?라고 생각되는 일에
내가 아닐 경우도 거의 없더라.
이 글은,
원석에서 철을 찾는 여정이었던 '돌'같은 10대,
남들의 말과 태도에 쉽게 타오르고
또 금방 식어버렸던 '쇠'같은 20대,
절대 굽히지 않는 신념의 화신이 되어
남들을 태우고 식혔던 '불'같은 30대를 보내고
40대 중반이 되어서도 여전히 방황 중인 청춘이
이제사 방황을 시작하는 청춘에게 보내는 연서.
그리고,
그 시절의 나에게 보내는 셀프레터.
*사진출처: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