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건 병이고, 아는 게 약이지
매년 새해가 시작되면 처음 한 두 달은
새해의 연도가 입에 잘 붙지 않아.
그래서 전년도로 말하고 쓰는 실수를 종종 하곤 해.
올해도 역시나 그랬고.
그런 2024년도 이제 두 달밖에 안 남았네.
지나고 보면 시간 참 빨리 흐르는 것 같아.
오늘, 지금, 이 순간.
시간 위에 올라타 시간과 함께 가고 있을 땐
잘 느끼지 못하지만,
어제, 지난달, 지난 일 년.
시간에서 내려와 지나간 시간을 되짚어 보면
마치 빛의 속도로 지나온 기분이야.
이제 2023년이라고 하면
아득히 먼 옛날 같은 느낌이 들거든.
올해도 두 달 밖에 남지 않은 지금.
너는 어디서, 어떤 방황을 하며 흔들리고 있을까.
올 겨울은 조금 따뜻하게 방황을 하면 좋겠다.
너도.
나도.
여름이었어.
대학교 3학년이었는지, 4학년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여름이었어.
기말고사가 끝나고 한 교수님께서 여름방학 동안
할 수 있는 인턴자리에 날 추천해 주셨어.
작은 광고회사였지.
내가 갔을 때 회사는 클라이언트의 꽤 큰 행사를
준비하는 프로젝트로 분주하더라.
그래서 첫 한 달은 나도 주로 그 일을 하게 됐지.
지방 곳곳에 공장을 갖고 있는 클라이언트여서
출장도 자주 갔다 왔어.
그렇게 정신없는 한 달이 끝날 무렵,
사무실 내 자리에서 다음 프로젝트에 필요한 자료를
열심히 찾고 있는.. 척을 하며 웹툰을 보고 있는데
뒤통수가 서늘한 거야.
이럴 땐 너무 급하게 뒤를 돌아봐서도 안되고
당황해서 떨리는 손으로 보던 창을 닫아서도 안돼.
스크롤을 휙휙 아래로 내리며,
"음... 여기선 별로 딸 게 없네."라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가능한 주변에 잘 들리게
혼잣말을 하는 거지.
그렇게 혼잣말을 하고 한 손으로 어깨를 주무르며
언제 뒤를 돌아볼지 타이밍을 재고 있는데,
뒤에서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거야.
"나비야, 그냥 편하게 놀아. 오늘 대표님 오후에나 들어오셔."
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경리 담당 대리님이었어.
"아오, 누나 깜짝 놀랐잖아요. 저승사자처럼 그렇게
뒤에 서 있지 좀 마요. 그리고 노는 거 아니거든요?
자료조사. 이게 다 자료조사의 일환인데.."
누나도 나처럼 지방에서 올라온 유학파였는데,
천사를 의인화하면 딱 이 누나일 거야.
첫 출근 날, 누나는 나랑 동갑인 남동생이 있다며
그냥 누나라고 부르라고 했고,
나도 위로 누나가 한 명 있었기에
거부감 없이 누나, 누나 거리며 잘 따랐어.
항상 웃는 얼굴에,
조곤조곤,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말투.
인턴으로 있는 두 달간 나는 누나가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는 걸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그런 누나가 딱 한 번,
표정 관리를 못하는 걸 본 적이 있는데..
그게 이 날이었어.
"나비야, 지난번 지방 출장 갔을 때 사용한 경비,
이따 그거 정리해서 엑셀파일로 좀 보내줘."
"지금 바로 하겠습니다! 충성!"
손가락 세 개만 오른쪽 눈썹 옆에 갖다 붙이고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경례를 하는 나를 보며
누나는 다시 키득키득 웃더니 자리로 돌아갔어.
보던 웹툰창을 끄고, 바로 엑셀을 실행했지.
놀라운 사실을 하나 얘기해 주자면
엑셀을 써본 적이 이때가 거의 처음이었어.
전공이 전공이니만큼,
파워포인트는 많이 다뤄봤는데 엑셀은 학교에서
한 번도 쓸 일이 없었거든.
그래봤자 뭐 다를 게 있겠어.
칸이 나뉘어 있으니 표 그리는데나 좀 특화된
프로그램이겠지.
수 백개의 네모칸으로 나눠진 화면을 보며 타이핑을 시작했어.
타이틀과 오늘 날짜를 쓰고,
출장 기간과 출장 개요를 간략히 정리했을 뿐인데
벌써 뿌듯한 거야.
이러다 보고서의 귀재가 되겠는데?
엑셀, 뭐 별거 없네.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며 다시 한 칸 한 칸 숫자를
채워나갔지.
수 십 개의 네모들이 숫자들로 빼곡히 채워졌고,
모든 영수증을 화면에 다 옮기고 난 그때.
나는 책상 서랍을 열고 그 안에서 고이 잠자고 있던
비장의 무기를 꺼내 키보드 옆에 놓았어.
"가만있어보자~ 식대가 칠천 원, 만이천 원, 오만사천 원... 포토그래퍼 유류비 오만 원, 칠만 원..."
엑셀 화면 속, 수 십 개의 직사각형 칸에
단정하게 정리해 놓은 숫자들을 보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전자계산기의 버튼을 두드렸어.
1873800
서랍에서 꺼낸 전자계산기에 최종적으로 찍힌
숫자를 보며 나는 씨익 한 번 웃었어.
계산기를 두드리던 손가락을 키보드로 바꿔 올리고
엑셀의 마지막 칸을 채웠지.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나 누나에게 달려가
이 기쁜 소식을 알리려다 들뜬 궁둥이를 잠시 주저앉혔어.
'아니지, 내가 아무리 계산의 귀재라도.. 혹시 뭔가
하나 빼먹었거나, 계산기 숫자버튼을 하나 잘 못
눌렀을 수도 있는 거잖아. 정리하는 누나 힘들게
하지 말고, 한 번 더 확인해야겠다.'
다시 손가락을 계산기로 옮겼어.
눈도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엑셀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타이핑되어 있는 숫자들을
계산기로 다시 한번 두드렸어.
1873800
두 번째 계산에도 처음과 같은 숫자가 나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엑셀파일을 누나에게 보냈어.
[누나 출장 비용 정산해서 보내드렸어요~]
아, 일잘러의 삶이란 이런 건가.
머리 뒤로 양손 깍지를 끼고 눈을 감아보았어.
신입사원 박나비로 시작해서
이달의 우수사원,
조기 진급 대상자,
최초의 30대 임원,
급기야 평사원으로 입사해 사장의 자리까지 오른
전설의 회사원까지.
여름방학 소기업 인턴의 자리에서
대기업 사장의 꿈을 꾸며 실실 웃고 있는데
귓가에 노래가 들려오더라.
나비야~ 나비야 이리 날아오너라~
응? 뭐지?
정신을 차리고 뒤를 돌아보니 천사 누나가 서있어.
"나비야! 나비야!"
"아, 네 누나! 밥 먹으러 가요?"
"아니, 너 이거 비용 정산한 거 어떻게 한 거야?
수식이 하나도 없던데? 숫자 정확한 거 맞아?"
누나!
그거 제가 계산기로 두 번이나 계산했어요! 완전 정확해요!
그때 누나의 표정을 너도 봤어야 하는데..
여름이었어.
그 사건이 있고,
나는 엑셀의 무궁무진한 기능에 하나씩 눈을 뜨게
되었고, 여의도 모 기업에서 일을 할 때는
무려 브이룩업까지 현란하게 다루는 엑셀리스트가
되어있었지.
물론, 그로부터 십 년이 넘게 흐른 지금은
겨우 사칙연산만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도로 돌아왔지만 말이야.
모르는 게 약이고, 아는 게 병이라지.
회사에선 그 반대야.
모르는 건 병이고, 아는 게 약이지.
모르면 물어보고, 알게 되면 힘이 돼.
그렇게 성장하고, 특화되고, 인정받는 거야.
어차피, 회사는 다녀야 되고 돈은 벌어야 하잖아.
그러니, 모르는 게 있으면.
부끄러워도, 혼날 것 같아도 물어봐.
엑셀에 숫자 적어놓고 계산기로 더해본 사람도 있는데 뭐.
그렇게 알고 넘어가면 다음엔 아는 사람이 되는 거니까.
그럼 나중엔 아무도 몰라.
네가 모르는 사람이었다는 걸.
전문가가 별 거 아니야.
그렇게 전문가가 되는 거지 뭐.
아, 그리고 업무뿐 아니라 회사의 여러 상황들도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는 게 좋아.
내 일만 묵묵히 잘하면 될 것 같겠지만
회사가 그렇게 헌신하는 직원 알아서 잘 챙겨주는 곳이 아니거든.
다시 한번,
모르는 건? 병!
아는 게? 약!
뭐, 내가 있어본 회사들은 다 그렇더라.
이 글은,
원석에서 철을 찾는 여정이었던 '돌'같은 10대,
남들의 말과 태도에 쉽게 타오르고
또 금방 식어버렸던 '쇠'같은 20대,
절대 굽히지 않는 신념의 화신이 되어
남들을 태우고 식혔던 '불'같은 30대를 보내고
40대 중반이 되어서도 여전히 방황 중인 청춘이
이제사 방황을 시작하는 청춘에게 보내는 연서.
그리고,
그 시절의 나에게 보내는 셀프레터.
*사진출처: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