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참 신기하게도 흘러가지
인생이 계획대로만 흘러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안타깝게도 우리 인생의 대부분은
우리가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아.
오히려, 계획과는 전혀 무관하게.
실제론, 아주 우연하게 흘러가지.
마트를 가려고 집 앞에 잠깐 나왔는데,
집 앞 따릉이(서울시 공유자전거) 보관소에
새 따릉이가 있는 거야.
이제 막 자전거 공장에서 출고된 것 같은
완전 새 따릉이가!
이제껏,
페인트칠이 다 벗겨진 헐벗은 따릉이.
브레이크를 잡으면 끼익끼익 울어대는 익룡 따릉이.
바퀴 바람이 빠져 꿀렁꿀렁대는 꿈틀이 따릉이.
이런 따릉이들만 주로 타고 다녔던 내 입장에서
얼마나 놀랍고 반갑던지.
그 자리에서 바로 따릉이 앱을 켜고 대여를 했어.
그리고 마트 대신 압구정까지 라이딩을 다녀왔지.
집 앞을 나올 때까지만 해도 집 반경 100미터를
벗어날 계획은 정말 1도 없었는데
집을 나선 지 30분 만에 집에서 10킬로미터 떨어진
압구정나들목에서 나는 한강을 바라보고 있네.
유유히 흘러가는 한강을 바라보고 있으니
살아온 날들이 머릿속에서 주루룩 흘러가더라.
주루룩 흘러가는 나의 인생역정들을 다 보고 난 뒤
인생의 주요 장면들을 다시 리와인드해 봤는데
그중에 계획대로 흘러간 장면이 거의 없는 거야.
뭔가 굵직하고 중요한 이벤트들은 거의 대부분이
우연이었어.
인생,
‘운칠기삼’이라더니.
'운'과 '기'가
'우연'과 '계획'인가 보더라.
어릴 때 시험기간이 되면 계획을 세우잖아.
오늘은 몇 시부터 몇 시까지 국어를 하고
국어하고 나면 사회.
내일은 몇 시부터 수학, 뭐 이런 식으로.
혹시, 그 계획대로 시험공부를 한 적이..
설마 있어?
방학이 되면 방학 계획표를 짜잖아.
벽시계처럼 큰 동그라미를 그리고
그 안에 중심점에서부터 선들을 가지런히 긋지만
그어놓은 그 선들대로 시간을 지킨 적은?
물론 없지.
회사는(그게 어떤 회사든 별 차이는 없었어)
허구한 날, 주구장창, 주야장천!
계획을 짜.
정말 징그럽게도 계획을 짜대.
금요일이면 다음 주 주간 계획을,
월말이 되면 다음 달 월간 계획을,
그렇게 분기별, 반기별, 연간 계획을
정말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하루에도 열두 번씩 고쳐가며 계획을 짜.
엑셀 시트를 보면 빼곡하게 모든 일정이 세세하게
다 들어가 있고, 각 일정별로 예산 배분도 어찌나
상세하게 매칭되어 있는지.
보고 있노라면 정말 예술이 따로 없어.
그럼 회사의 일주는, 한 달은, 일 년은
그 계획대로 그렇게 잘 돌아가느냐?
설마.
그럴 리가 있겠어.
몇 억짜리 캠페인이 말 한마디에 날아가고,
회의에서 가볍게 나온 발언이 흐르고 흘러
갑자기 회사를 대표하는 캠페인이 되어
총력적으로 가기도 하는 게.
이것 참, 보고 있으면 이 정도 규모 회사가
정말 이런 식으로 흘러간단 말이야?
이렇게 해도 회사가 유지가 된다고?
정말? 정말?
놀라움이 끊기지 않을 정도야.
또 어느 날 갑자기,
부서통폐합이 일어나 생각지도 못한 부서로
발령이 나기도 하고
나는 사과를 따는 자린 줄 알고 들어왔는데
갑자기 개구리를 잡아오라고 시키기도 해.
처음엔 화가 났지.
이해가 되지 않아.
회사일이 무슨 초딩 방학 계획표도 아니고,
일도 지들 마음대로,
조직도 지들 마음대로..
이게 회사가 맞는 거야?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리 불합리하거나 부정한 지시도 아니었는데
그 당시엔 왜 그리 화가 나던지.
크게 보면 업무 시간에 회사일을 시키는 건데
조금만 계획과 다른 일이라면,
약간만 업무분장에 벗어나는 일이라면
분연히 일어나 온몸으로 저항했어.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는다!
그렇게 분연히 일어나 온몸으로 항의를 해본들
일개 사원이 분노해 봤자지.
결국 회사를 박차고 나와 다른 회사로 이직을 하기도 했고, 또 어느 곳에서는 분노조차 하지 못하고
도망치듯 다른 곳으로 옮기기도 했어.
그럼 그곳들 중에 계획대로만 일이 진행이 되고,
모든 의사 결정이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 그리고
논리적으로 이루어지는 곳이 있었을까?
... 그런 곳이 어딨겠어.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은 없어.
직장인의 유토피아란 존재하지 않아.
회사는 미친 듯이 계획을 세우고,
또 미친 듯이 그 계획을 바꿔.
그리고 실제로 내가 하는 일들은
도대체 왜 하는지 이해 안 가는 일들 투성이지만..
그래도,
회사는 돌아가고 매출은 나오더라.
월급은 인상되고 직급은 올라가더라.
계획에 없는 일입니다!
제 일이 아닙니다!
월급 받고 일하는 사람이 된 이상
주어지면 내 일이고, 하다 보면 또 바뀌어.
그러니,
갑자기 계획에도 없던 일이 주어져도,
너무 딱 잘라 거절하거나
굳이 불쾌감을 티 내지는 말도록 해.
사람 일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거거든.
갑자기 다가온 그 우연에서 새로운 기회가 보이고
생각지도 못한 다른 세상이 열릴 수도 있어.
내가 아는 분 중에 본 업무와는 전혀 무관한
프로젝트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회장님 눈에 띄어
임원까지 초고속으로 올라간 분도 있어.
물론, 모두가 다 저렇게 운이 좋을 순 없지만
어차피 해야 되는 일이라면 조금만 유연하게 받아들이면 좋지 않을까.
우연히 어떤 일이 다가오면
유연히 그 일을 받아들여봐
이리저리 잘 휘는 나무가
쓰임새도 많더라
세상만사 참 신기하게도 흘러가더라.
이 글은,
원석에서 철을 찾는 여정이었던 '돌'같은 10대,
남들의 말과 태도에 쉽게 타오르고
또 금방 식어버렸던 '쇠'같은 20대,
절대 굽히지 않는 신념의 화신이 되어
남들을 태우고 식혔던 '불'같은 30대를 보내고
40대 중반이 되어서도 여전히 방황 중인 청춘이
이제사 방황을 시작하는 청춘에게 보내는 연서.
그리고,
그 시절의 나에게 보내는 셀프레터.
*사진출처:pixabay, 베르세르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