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남자(秋男) 이야기
아침에 일어났는데
코에선 맑은 물이 주르륵 흐르고
한 번 재채기를 시작하면
대여섯 번은 연달아 나오는 걸 보니,
바야흐로 가을입니다.
천고마비, 독서의 계절, 단풍놀이..
가을 하면 대부분 이런 것들을 떠올리실 테지만
저에게 가을은,
비염입니다.
여름 한 철 잊고 살다
날이 쌀쌀해지기 시작하면 신호가 옵니다.
감기에 걸린 것도 아닌데
무의식 중에 계속 코를 훌쩍이고 있습니다.
계속 훌쩍이다 목에서 짠맛이 느껴질 정도가 되면
그제야 깨닫습니다.
'아, 이제 본격적인 가을이구나.'
의자에 앉아 있는데
뜨뜻한 액체가 코에서 주르륵 흘러내립니다.
코피인가 싶어 황급히 머리를 뒤로 젖힙니다.
손을 더듬어 휴지를 찾아
입술 위까지 내려온 액체를 닦아냅니다.
머리를 바로 하고 휴지를 내려다보면
휴지는 여전히 새하얀 그대롭니다.
'아, 이제 본격적인 가을이구나.'
비염에 좋다는 작두콩도 끓여 마셔보고
수세미도 차로 끓여 마셔보았지만,
따뜻한 차가 주는 기본적인 기분 좋음 외에는
뚜렷한 효과를 보진 못했습니다.
도꼬마리를 달여 마시면 그렇게 좋다고
친구J가 추천을 해주었지만
(*도꼬마리는 풀숲에서 옷이나 머리에 잔뜩
달라붙는, 흔히 '도깨비풀'이라고 알고 있는
국화과에 속하는 한해살이 풀입니다.)
작두콩이나 수세미가 하지 못한 일을
도꼬마리가 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아
시도해 보지 않았습니다.
혹시, 관심 있으신 분들은 도꼬마리 한 번
시도해 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J의 말에 의하면 질 좋은 도꼬마리를 구해야
효과를 제대로 볼 수 있다고 하니,
상품의 도꼬마리를 잘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솔직히,
작두콩이니 수세미니 해도(도꼬마리는 직접
시도해보지 않아 확정 짓지 않겠습니다.)
증상이 심할 경우 저에겐 지르텍 반 알이 최고입니다.
이처럼 매년 가을만되면 얼굴에선 동네 바보형처럼
맑은 콧물이 주르륵 흐르고,
한 번 재채기를 시작하면 온 식구들이 놀라
뛰쳐나올 만큼 대여섯 번을 연달아 해대니
이것 참, 미중년의 꼴이 말이 아닙니다.
완연한 가을에 태어난 추남(秋男)으로서,
누구보다 온전히!
덥지도 춥지도 않은 완벽한 이 계절을
누릴 수 있어야 함에도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이 저를 너무 슬프게 합니다.
한 때는 가을에 태어난 추남(秋男)으로서,
저에게도 로맨틱한 꿈이 있었습니다.
가을이 되면
바바리코트의 깃을 목 끝까지 세우고
떨어지는 낙엽을 맞으며
낙엽 쌓인 그 길을 쓸쓸히 걷는.
비련의 주인공이 되는, 그런 꿈 말이죠.
하지만 현실은,
가을이 되면
조용히 크리넥스 한통을 꺼내 들고
흘러내리는 콧물을 열심히 훔치며
쌓인 휴지더미에서 쓸쓸히 타이핑을 하는.
비염의 주인공이 되어버렸다죠.
역시, 인생이란..
어느 서늘한 가을 아침,
비련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지만
비염의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었던
한 중년 남성의 가슴 아픈 사연이었습니다.
행복한 가을 보내고 계시길 바랍니다.
*사진출처: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