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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나비 Sep 05. 2023

당신만의 헛간

와인 한 스푼, 수다 세 스푼 일상 와인 스토리

본격적으로 와인 이야기를 쓰려니 영 쑥스럽고,

눈치가 보인다.

와인 라벨만 찍으면 평점과 리뷰와

심지어 와이너리의 정보까지 한 번에 볼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는데, 동네에서 와인 좀 사 먹는

아저씨가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뭐가 있을까.

아니 동네에서 와인 좀 사 먹는 아저씨의 이야기를

누가 읽기나 할까. 그게 도움은 될까.


아니다. 동네에서 와인 처음 사 먹는 아저씨에겐

도움이 되겠지. 그래. 이런 자세를 견지하도록 하자.


좋다. 이런 마음으로 ‘제2화. 당신만의 헛간’ 시작.  




제2화. 당신만의 헛간


찬란한 햇살이 내리쬐던 6월의 어느 날.

광화문, 경복궁, 인사동을 거닐며 평일의 적절한

인파 속에서 광합성을 좀 하다,

한적한 식당에 들어가 와인 한잔 하면

딱 좋을 그런 날.


여전히 시간이 많던 나는, 여전히 직장일로 바쁜

친구 L을 불러낸다.

나 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나보다 더 와인을

좋아하는 L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L의 직장이

광화문이기 때문이다.


직장에서 반차를 내고 나온 L과의 접선은

금세 이루어진다.

그렇지. 출근을 안 했으면 연차의 특권,

출근을 했으면 반차의 특권을 누려야

자랑스러운 K직장인이라 할 수 있지.

오늘 해야 되는 일이 산더미라지만,

그건 내일의 너에게 맡기고

오늘은 같이 찬란한 6월의 햇살을 즐기자.


아직 낮시간이라 와인을 파는 술집들이 대부분

문을 열지 않아 난감하던 그때.

구세주처럼 나타난, 카페처럼 보이지만 와인도

판다는 안국동의 한 가게.


엘리베이터도 없는 가파른 3층 계단을 올라가며

‘후웁’ 들숨 한 번에 불만 한가득을 담고,

‘하악’ 날숨 한 번에 그 불만을 도로 내뱉으며

등반을 시작한다.


등반 초기엔 3층에 자리 잡은 가게를 욕하기

시작하다 중간쯤부턴 하찮은 몸뚱이를 원망해

보지만…

뭐 어쩌랴, 와인은 마시고 싶고,

오픈한 가게는 여기뿐인 것을.


마침내 무산소 등정으로 정상 등반에 성공한

우리에게, 와인 가게는 사방 시원한 통유리로

그 보답을 해준다.

아! 탄성이 절로 나오는, 절경이다.


정독 도서관이 훤히 보이는 코너에 자리 잡고 앉아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메뉴판을 정독한다.

메뉴판의 와인 섹션을 들여다보니 모르는

와인 브랜드들 사이에 아는 브랜드가 하나 있다.


롱반(LONG BARN)

검지 손가락 끝으로 롱반이라고 쓰여진 곳을 집고,

옆으로 주욱 선을 그어본다.

Glass 10, BOTTLE 40. 한 잔 만원, 한 병 4만 원.


무조건 병으로 먹는 우리에게 잔 가격은

별 의미가 없다. 그 행동을 지켜보던,

아직 롱반을 먹어 보지 못한 L이 시켜보면 어떠냐며

눈짓을 한다.

냉정하게 고개를 저으며,

그 위 모르는 와인을 시키기로 한다.


롱반은 와인을 마시던 초창기에

4900원, 6900원 와인만을 줄기차게 마셔대며

‘이 놈 먹고 취하나, 저 놈 먹고 취하나 매 한 가지지’

라는 단순한 와인 철학을 고수하던 나에게

정말 놀라움을 선사해 준 와인이다.

물론 지금도 데일리로 믿고 마시는

아주 고마운 녀석이기도 하다.


상시가 만원 중반, 할인가 9900원.

가격보다 더욱 좋은 건 접근성이다.

웬만한 편의점이나 마트에 가면

항상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아무리 가격이 좋고, 맛이 좋더라도

내 주변에 없으면 무슨 소용인가.

친구도 그런 친구는 별 쓸모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

애인은 말해 뭣하랴.


9900원 행사가에 익숙해지면,

만원 중반 상시가에 선뜻 손이 안 가는 게

가장 큰 문제인 이 녀석은 미국와인이다.

신대륙의 대표 주자답게 연도별로 거의 차이가 없이

일정한 풍미를 보여준다.


그럼 이쯤에서 잠시. 언젠가 어디선가

당신이 한 번쯤 은 들어봤을 신대륙이니,

구대륙이니 하는 가장 큰 지역 구분에 대해

살짝만 알아보기로 하자. 정말 살짝만.


‘구대륙’은 전통적인 와인 생산지역을 의미하며

주로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을 말한다.

그냥 유럽 국가들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신대륙’은 이들로부터 와인이 전파된 나머지 대륙.

주로 북미와 남미의 미국, 캐나다, 칠레, 아르헨티나

등과 호주, 뉴질랜드, 남아프리카공화국까지.

유럽 이외의 대부분 지역이 이에 해당된다고

보면 된다.


구대륙 와인은 대체적으로 산미가 높고,

신대륙은 당도가 높고… 등의 큰 범주에서 구분 짓는

특성들도 있지만, 사실 그런 분류를 개인적으로

좋아하지도 않을뿐더러 와인이 그렇게 무 자르듯

잘라서 구분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어서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하기로.


더구나 이렇게 공부하 듯 와인을 대하는 건

당신의 즐거운 와인 생활에 그리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스치듯 살짝 지나가는 정도로만

보는 것이 좋다.

절대 이 글을 쓰는 이의 지식이 이 정도가

다라서가 아니다. 정말이라니까?


미국 와인은 대부분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생산된다.

캘리포니아에서 미국 와인의 거의 90% 이상이

생산되며, 양질의 와인은 대부분 그 유명한

‘나파밸리’에서 생산된다.

이 지역을 베이스로 하는 롱반은

그래서 꽤 신뢰할 만한 와인이다.

특히, 와이너리의 와인메이커가 이탈리아 출신의

3대째 가업을 이어온 양조업자라면

더욱 그러하지 않을까.


이처럼 구대륙의 전통적인 양조 기법과

신대륙의 좋은 토양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롱반이기에, 많은 이들이 본인의 가성비

원픽 와인으로 롱반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와인의 이름인 롱반은 이들이 와인을 제조하는

실제 긴 헛간을 의미함과 동시에,

자연 그대로의 맛을 지향하는 와이너리의 의지를

담고 있기도 하다.


MADE WITH ALL THAT WE ARE

TO REFLECT ALL THAT WE'VE COME FROM


홈페이지의 모든 텍스트 중에 가장 큰 사이즈로

적혀 있는, 슬로건과 같은 저 문구를 보고 있으면

그들의 지향점이 무엇인지 확연히 느껴진다.


롱반 시리즈는 부드러운 버터향, 부담 없는 단 맛이

특징이며 까베르네쇼비뇽, 메를로, 피노누아,

진판델, 샤르도네 등(와인의 품종에 대해선 언제

한 번 살짝 훑어보기로 하자. 더 이상의 공부는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좋지 않다.)

다양한 종류의 와인을 제작하기에 종류별로

한 병씩 구비해 두고 맛을 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어느 품종을 마셔도 꽤나 만족할 만한 맛을

선사한다. 다만 향은 약한 편이니(가격대를

고려했을 때 당연하지 않을까), 괜히 폼 잡는다고

잔을 빙빙 돌려가며 코를 대고 향을 맡는

퍼포먼스는 지양하는 것이 좋겠다.


마찬가지로 구조감이니 복합미니 하는 부분들을

느낄 수 있는 와인은 아니므로 단 시간에 맛있게

한 병을 다 비우는 것이 롱반을 먹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처음 마셔본 와인이 알코올향이 너무 강해서

또는 산도가 높아서, 아니면 뭔가 구체적으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쓰기만 하고 맛이 없어

실망한 당신이라면, 우리가 지금 얘기하고 있는

이 와인 ‘롱반’을 ‘강력’ 추천드린다.


자,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 집 근처 가장 가까운

마트나 편의점으로 당장 달려가보자.

가장 가까운 편의점이나 마트에 갔는데 없다고?

이런, 두 번째로 가까운 마트나 편의점으로 가보면…


롱반을 마시는 동안만큼은, 당신에게도

당신만의 헛간이 생겼다고 느껴지면 좋겠다.

그리고 그렇게 느끼게 된다면,

좋은 사람들과 함께 마시는 즐거운 자리에서는

당신만의 헛간이 우리 모두의 헛간이 되어 줄지도

모를 일이다.


라벨에 그려진 긴 헛간과 함께

밴드혁오와 정형돈이 2015년 영동고속도로

가요제에서 불렀던 ‘멋진 헛간’을 들으며

오늘 밤을 즐겨 보심이 어떠할지.


시간은 또 금세 흘러 기댈 품을 떠나서

못 찾을 외딴곳에 멋진 헛간을 지었지

…Oh Holy Mama Mama PaPa 내 두 눈으로 봤어요

세차게 담았는데 다 텅 비어 있네요



* 안국동의 가게에서는 두 번째 방문 때 롱반을

마셨습니다. 식당이나 와인바에서의 와인 가격이

내가 아는 가격보다 많이 비싸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건 그리 현명한 행동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식당에서는 소매가 대비 적게는 2배,

보통 3배, 많게는… 저는 6배까지 올려놓은

메뉴판을 본 적이 있습니다.


마시는 장소와 시간이 좋다면,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당신과 함께 마시는 이가 좋아한다면

식당에서 굳이 와인 가격을 따져보지는 않길

권해드립니다. 오롯이 그 시간과 그 와인을

즐기는데도 부족하니 말입니다.


** 그런 까닭에 많은 식당들이 인터넷으로 검색해도

정보가 잘 나오지 않는 와인 브랜드들로 메뉴를

구성합니다. 그게 가능하냐구요?

1화에서 말씀드렸듯,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와인의

종류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숫자라는

걸 다시 한번 상기시켜 드립니다.  

물론, 아주 유명한 와인들을 아주 많이 갖춰 둬야

하는 전문 와인바는 또 다른 얘기지만 말입니다.


*사진출처: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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