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와인을 마시기 안 좋은 날이야 있겠냐만은, 오늘은 유독 와인을 마시기 좋은, 그리고 와인을 마시고 싶은 그런 날이다.
오늘 와인을 마시기로 결심했다면, 일단 그 과정부터가 즐겁고 행복하다.
화이트 or 레드, 아니 오늘은 짜릿하게 스파클링이냐를 두고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장고에 들어간다.
하지만 그럼에도 정하기가 쉽지 않을 때엔 먹고 싶은 음식을 떠올린 뒤 거기에 무엇을 페어링 해서 먹으면 좋을까로 방향을 틀어보기도 한다.
이러나저러나 그 과정은 참으로 즐겁고 행복하다.
그 과정에 동지가 있다면 이 즐거움과 행복은 배가 된다. 레드, 화이트, 스파클링을 종류별로 선택할 수도 있고 그에 맞는 음식들도 다양하게 맛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와인친구 한둘쯤은 꼭 만들어놓을 일이다.
하루 온종일 고된 노동으로 피폐해진 정신을 꾸깃꾸깃 구겨 실었던 퇴근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가는 길이면 와인 한 잔 생각이 간절해진다. 마침 집으로 가는 길목엔 애정하는 와인가게도 있다. 사실 가는 길목이라기보단 500미터쯤 돌아가는 길이긴 한데 그 정도면 거의 가는 길이라고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빨간 문을 열고 들어가면 갖은 와인들이 어서 날 데려가라고 손을 흔든다. 아, 저번에 저거 진짜 맛있었는데! 아, 얘도 진짜 훌륭하지, 엇! 이게 할인을 하다니! 류의 생각들을 하다가 정신을 차려보면 손엔 이미 제법 비싼 와인이 들려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급여를 받으려면 아직 남은 노동의 날들이 너무 많다. 급여꾼노릇을 하는 자라면 응당 이러한 사정을 고려해야 하는 법. 나도 몰래 들고 있던 와인병을 다시 제 자리에 내려두고 조심스레 가게구석을 살펴본다. 그래, 저거지.
와인가게 사장님의 의미심장한 눈빛과 미소를 뒤로하고 구매한 와인을 가슴에 꼭 품고 집으로 돌아간다. 치킨 한 마리 시킬 법도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급여꾼 노릇을 하는 자라면 응당..
집에 도착해서 샤워를 하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뒤 냉장고 문을 열어본다. 오호, 너 당첨.
데리고 나온 두부를 후라이팬에 살짝 굽는다. 올 초에 본가에서 받아온 김장김치를 접시에 옮겨 담는다. 뭔가 부족한 느낌에 냉동실을 열어본다. 그래, 네가 있었구나. 너도 나와.
굽고 있던 두부를 김치가 담긴 접시 한켠으로 옮겨 놓고 만두를 굽는다. 이제 뭔가 좀 갖춰진 느낌이다.
고이 모시고 온 와인을 딸 차례다. 오늘 와인 마개는 코르크가 아니다. 돌려따는 스크류캡도 아니다. 아니 그럼?
오늘 와인 마개는 바로!
수도꼭지를 틀듯 플라스틱 조리개를 돌리면 와인이 콸콸 쏟아져 나오는 신나는 방식이다!
잔에 얼른 한잔을 따르고, 두부 하나를 입에 넣는다.
두부가 거의 다 삼켜질 때쯤 와인 한 모금을 삼킨다.
향이 좋고 바디감이 있으며 피니쉬가 끝내주는 비싼 와인도 좋지만, 오늘은 이거다!
행복감이 달아나기 전에 후라이팬에 있던 만두를 덥석 집어 입안 가득 구겨 넣는다. 크게 한 번 씹고는 급히 와인잔을 들어 와인을 가득 머금는다. 와, 조금만 늦었어도 입안이 홀라당 다 벗겨질뻔했다. 여러분 뜨거운 만두가 이렇게 위험합니다. 항상 군만두는 가운데를 찔러 열기를 빼고 드십쇼.
두부 한 조각, 만두 한 입. 그리고 3리터짜리 싸구려 와인 한 모금. 거기에 아무 책이나 펼쳐 한 두 페이지 정도만 읽어보는 시간. 세상 가장 소중한 시간이다.
결코 어느 하나에 집중하지 않는다.
3L짜리 저렴한 와인을 입안에 머금는데 1/4, 조금 늦게 뒤집어 중간 부분이 약간 타버린 군만두를 씹는데 1/4, 앞뒤 내용이 잘 연결되지 않아 읽은 문장을 또 읽는데 1/4의 정신을 집중한다.
응? 그럼 남은 1/4은 어디로?
이 모든 행위를 뒤로하고 왼손으로 괴고 있던 턱을 오른손바닥으로 옮기며 멍을 때리는데 마지막 1/4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멍 때리는데도 집중력이 필요하냐고? 아니 이걸 모른다고? 멍 때리는 데는 정말이지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두부 위에 김치를 올리는 내가 보이고, 가위를 가져와 군만두를 반으로 자르는 내가 보인다. 3리터짜리 와인통의 꼭지를 돌려 빈 와인잔을 채우는 내가 보이고, 앞에 펼쳐진 책의 활자들이 춤을 추듯 흔들리는 게 보인다. 그리고 이 모든 모습들을 보며 머릿속을 비우고 있는 내가 보이면..비로소 멍 때리기에 제대로 들어간 것이다.
자신이 얼마만큼을 마셨는지 모른다는 것이 유일한 단점인, 내가 애정하는 3리터 대용량 와인.
내일도 잠에서 덜 깬 정신을 꾸깃꾸깃 버스에 구겨 넣고 일터로 나가야 하기에 3L 짜리 대용량 와인팩을 서너 번 흔들어 본 뒤 오늘은 이쯤에서 그만 마무리하기로한다.
급여꾼 노릇을 하는 자라면 응당..
* 모두 3L 만큼 사랑합니다.
*이미지출처:어벤져스엔드게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