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어떻게 될지 몰라요. 내 먹고 사는 길이 될 수도 있고요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 그들 앞에서 새로 사귄 친구 이야기를 꺼내도, 그들은 중요한 본질에 대해서는 결코 질문할 줄 모른다. "그 아이 목소리는 어떠니? 그 애가 가장 좋아하는 놀이는 뭐지? 그 애는 나비를 수집하니?" 이런 질문을 하는 어른은 없다.’우리에겐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라는 문장으로 친숙한 소설’어린 왕자’에서, 제가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던 구절입니다.
노동의 가치를 증명하는 월급만으로는, 더 이상 발 뻗고 살 수 없는 사회입니다. 그러기에 어딜 가나 주식, 부동산 이야기로 가득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집 마련이 무지개 넘어 닿을 수 없는 꿈동산처럼 느껴지는 마당에, 순수한 흥미나 열정 따위는 ‘세상 물정 모르는 철없는’ 이야기로 치부되기 일 쑤 이지요.
정아람(31)님은 애니메이션, 드라마, 뮤지컬 등을 섭렵하며 덕후의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습니다. 코스프레를 하기 위해 옷감을 직접 떼고, 배우에게 보낼 포토북을 만들며 뜨거운 팬 레터를 한 땀 한 땀 써 내려갔지요. 누군가가 보기엔 가장 무용한 일에 열과 성을 바쳤던 그녀가 덕후 생활을 되돌아보며 얘기합니다. 누구도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시대에 가장 확실하고 효율적인 건, 내가 사랑하는 일에 에너지를 쓰는 것이라고요. 그렇게 공수를 들이다 보면 뜻하지 않게, 내 먹고 살길이 다시 보일 수도 있다고요.
저만치 밀어두었던 내 안의 덕후 본능을 일깨우며, 아람님과의 팬미팅을 시작해봅니다.
자기소개해 주세요
안녕하세요. 저는 31살 사노비입니다. 정아람이라고 합니다.
본인을 사노비로 소개하셔는데 왜인가요?
직장에서 녹봉을 받고 있으니까 노비지요.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서비스 기획하고 있습니다.
IT 서비스 구요, 웹페이지나 모바일 앱 페이지가 있잖아요. 처음에 어떤 의도로 누가 사용하는지 어떤 서비스를 담아낼지 그런 걸 만들고, 뼈대를 설계하고 개발자분들이랑 디자이너 분들이랑 의사소통하면서 하나의 서비스를 만들어 나가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대학교 땐 러시아어 전공을 하셨다고요?
중국어나 일본어는 잘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노다지 같은 러시아 어를 해보자. 배워서 졸업을 할 때쯤 되면, 일자리가 많지 않을까' 해서 갔죠. 가고 나서 첫 학기에 이건 아니구나라는 걸 느꼈죠. 너무 어려웠어요.
생각보다 러시아에서 살다 온 사람들도 많고,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고, 언어적으로 트인 사람들도 너무 많았기 때문에 그 사람들보다 더 일을 잘하기에는 어렵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언어도 그 나라의 성향을 따라가는데, 저랑 잘 맞지 않는 것 같았어요. 겨울이 너무 길어서 정말 돌아버리겠는 거예요. 물론 사람들은 너무 좋아요. 제 감성은 아니었던 거죠.
어떤 덕질을 하셨었어요?
중학교 때부터 이야기하면, 일본 애니가 있었고, 드라마가 있었고, 뮤지컬이 있었고 그리고 배우들이 있었고, 또 좋아하는 운동이 있었어요.
꽂히게 된 계기가 있나요?
덕통사고에는 계기가 없어요. 어느 날 봤는데 그가 내 뒤통수를 후려치는 기분?
마지막으로 열정적으로 봤던 드라마는 '미스 함무라비'. 티저 영상을 봤는데 여주인공이 법원에 있는 복장 규정에 대한 관습을 부수고자, 부르카인가 히잡을 쓰고 등장하는 게 있어요. 그걸 배우분이 너무 맛깔나게 잘해서 '이건 봐야겠다!' 그래서 봤죠.
십 대 때는 학업에 지치다 보니까 탈출구가 필요해서 심하게 빠져들었다고 하면, 지금은 해야 되는 것도 많고, 직장도 다녀야 하고 이것저것 이걸 균형 있게 하면서 덕질을 깊게 팔 수는 없고, 일상에서 활력을 찾을 정도로만 하려고 해요.
덕질 어디까지 해보셨어요?
마지막 덕질 기준으로 말씀드리면, 드라마 오프 행사를 뛰었어요.
요즘은 사전 제작 드라마가 많아서 잘 없지만, 그전에는 방영 중간중간에 커피차라든가 간식 차를 보내는 경우가 있었어요. 커뮤니티에서 십시일반 돈을 모아서 했어요. 현수막을 몇 번 했어요.
한 번은 연예가 프로그램 뒤에 그 현수막이 나온 거예요. 나중에 알았는데 이게 왜 나오지? 원래 종방연 때 절대 안 나오거든요. 요즘은 인스타 하시는 분들이 많아서 스태프나 배우들이 사진을 찍어 올려주면 누군가는 퍼다 날라서 ‘우리 거 떴다' 보고, 또 종방연에 셀카 찍은 사진 보면서 드디어 끝났구나! 싶어요. 뭔가 내 새끼를 떠나보내는 마음 정리를 그렇게 해요.
커뮤니티에서 모여서 하게 되는 덕질의 특징이 있나요?
다른 쪽은 모르겠는데, 일단 연예계 관련 쪽은 익명이 기본, 나의 얼굴을 너에게 드러내지 않는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
그런 덕질의 원동력이 무엇일까요?
그 결과물을 보는 상대 유명인들이 내 껄 알아봐 줬으면 하는 그런 마음도 사실 조금은 있어요. 그런데 사실은 내 만족! 그리고 잘 만들다 보면 이게 내 작품이잖아요.이게 회사에서 펼칠 수 없는 내 능력, 하지만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 회사에 가면 내가 이걸 할 줄 안다고 하면 이용당하고 버려질 능력. (웃음) 하지만 온전히 내 만족을 위해서 쓸 수 있다는 그런 게 있잖아요.
이 능력이 발전돼서 나중에 프리랜서로 투 잡을 뛸 수도 있는 거고 아니면 다른 재능을 발견해서 다른 쪽으로 갈수 있는 거고, 또 다른 나를 발견하게 되는 기회인 것 같아요.잡다한 지식도 많아지고. 단순하게 그쪽 분야 말고 오고 가다 보면 그쪽에 마주치는 사람들도 많잖아요 사람 보는 눈도 키워지는 것 같고요.
제가 예전에 코스프레를 했어 가지고, 10대 때 일이에요.(웃음) 동대문에 천을 엄청 떼러 갔었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이젠 쇼핑몰에서 사진을 딱 보다 보면, 이건 어떨 것 같다는 감이 와요. 제가 옷을 만들어봤으니까요. 제가 몸치 수를 직접 재고 옷을 만들어보니까 '나는 팔이 좀 더 기니까. 어깨가 더 넓은 걸 사야 해 이건 옷 원단에 비해서 가격이 터무니 없이 비싼 것 같아. 그럼 브랜드 괜히 따라가지 말고 다른 델 좀 더 찾아볼까?' 그런 게 있어요 삶의 지혜? 뜻하지 않게?
그럼 직업으로 갖는다면 어떨 것 같으세요?
안 해 안 해 안 해. 잠깐 그걸 생각해본 적은 있어요. '뮤지컬을 워낙 좋아하니, 공연기획자를 한번 해볼까' 공연 제작자라든가 공연 업계에서 일해보고 싶다고요.
왜냐하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 옆에서 일하면 왠지 행복할 것 같을 거예요. 그래서 대학교 때 교내 공연 학회를 들어갔어요. 직접 해보니까 음.. '그냥 좋아하는 것은 좋아하는 것대로 두고. 일은 다른 걸로 삼는 게 낫겠다' 싶었어요.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을 일처럼 해보니까 애정이 식는 거예요. 그래서 덕질은 내 생활 활력소인데 덕업 일치가 되면 어느 순간부터 스트레스 해소가 안되고. 그냥 스트레스만 받을 것 같은 거죠. 이건 내 숨 쉴 구멍인데 남겨 놔야겠다. 저의 경우에는 그걸 분리를 시키는 게 제정신건강에 좋겠다 싶어서 분리해 놓았죠.
덕질을 낭비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죠. 뭐라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살다 보면 무언가 잘 하고 싶다면 그만큼의 시간과 비용과 투자를 해야 할 때가 있잖아요.
저는 개인적으로 학교 연구실에서 잠깐 일할 때, 교수님들을 면밀하게 지켜본 결과 그분들은 그 분야의 공부 덕후다 싶었어요. 어떻게 러시아 소설이 저렇게 재미있다고 생각하시는지 난 도저히 이해를 못 하겠는데, 그분들이 그만큼의 위치와 학생들을 가르치는 학식을 얻기 위해서는 진짜 많은 돈과 시간과 비용을 투자했을 거 아니에요. 그래서 그만큼의 경지에 오른 거잖아요.
뭐든 잘하려고 하면 그만큼의 공수를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야 해요 나를 갈아 넣어야 해요. 근데 그게 내가 애정이 있는 일이면 효율이 훨씬 좋거든요.
보통 그 낭비라고 하신 분들이 부모님 세대인 경우가 많아요 그분들 입장도 이해해요. 왜냐하면 그분들은 하나의 직업을 평생토록 갖고 있는 걸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던 세대라서 그럴 수밖에 없어요. 우리 부모님도 그렇고요. 근데 지금은 시대가 변했잖아요. 지금 당장 내일모레 제가 정리 해고될지도 몰라요. 제가 일하고 있는 업종이 없어질지도 모르고요. 인생이 어떻게 될지 몰라요. 그니까 여러 가지를 해두는 거죠. 그게 내 먹고 살길이 될 수도 있고요.
10년 뒤에 무슨 일하고 싶어요
그냥 에너지를 잃지 않는 일. 내가 매몰되지 않는 일을 했으면 좋겠어요.'사회생활하다 보면 저렇게 꿈 많던 사람이 어쩌다가 저렇게...'라고 얘기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직장인이 되면 어느 정도 포기하게 되는 게 있잖아요. 처음에 하고 싶은 게 있었는데 그게 없어지고 기계적으로 일만 하는 건 너무 슬플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자극을 계속 받을 수 있는 일. 그런 걸 찾아야겠죠
제목을 무엇으로 달아주었으면 좋겠나요?
어른이 돼버린 덕후의 이야기. 사회인이 돼버린 덕후의 이야기. 에너지가 찌들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