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하기 힘든 말

by 김 스텔라


트라우마가 나쁜 것은 결과적으로 나 자신과의 관계와 가까이하고 싶은 사람과의 관계를 해친다는 것이다.

나를 사랑할 수도, 사람을 사랑할 수도 없다면 행복에서 점점 멀어지게 될 것이다.

사실 나와 밀접한 관계과 아닌 사람이 주는 상처는 트라우마로 남지 않게 할 수 있다. 미국식으로 "You know me? No!" 라고 무시하고 차단 시키기도 하지만 가까운 사람에게서 받는 상처는 적절하게 처리되어야 한다.


상처의 진행 과정을 들여다보면,

먼저 상처 받으면 감정이 상한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런데 그 다음 과정에서는 두 가지의 다른 반응으로 진행된다.

상한 감정이 밖을 향하면 화를 내고 사람에게 기피대상이 되면서 마음의 문을 닫게 만든다.

한편, 상한 감정이 안을 향하면 화를 품고 대인기피로 마음의 문을 닫게 된다.

받은 상처를 잘 처리하지 못해서 진행되는 두 가지 반응은 둘 다 결국 관계를 맺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삶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힌다.


그렇다면 상한 감정이 계속 진행되지 않도록 막는 방법은 없을까?

최근에 겪은 두 가지 경험을 통해 절실한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딸이 손세정제를 찾으면서 코너 테이블 위에 있었는데 본 적이 없냐고 물었다.

평소 정리 정돈에 둔감한 딸과 늘어져 있는 꼴을 보기 힘들어하는 나와의 사이에서 심심찮게 벌어지는 광경이다.

"아니, 못 봤는데" 하고 보니 혹시 내가 치웠을 경우 본의 아닌 거짓말이 되어서 창피할 것 같았다. "그럼, 그 밑에 서랍에다 뒀나?..." 하고 말을 바꾸었다.

서랍을 뒤지던 딸은 "엄마가 치운 거 아니야? 지금 갖고 나가야 하는데...!" 하며 언성을 높였다.

'그러니까 몇 날 며칠씩 거기 두지 말고 필요하면 니 물건 두는 데다 뒀어야지'라는 말을 삼키면서 부엌 캐비닛을 여니 그곳에 찾던 손세정제가 있었다. 그제야 치운 기억이 났다. "어! 여기 있다." 라며 건네주니 딸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휙 나가 버렸다.

그때부터 상처 받은 마음의 두 가지 반응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쾌씸하고 분한 마음에 들어오면 "같이 쓰는 공간에 니 개인 용도 물건은 두지 마. 삼 일 후에도 그대로 있으면 치울 것이고 너는 나한테 책임 물을 수 없기로 하겠다."에서부터 "그런 태도는 용납 못한다. 고치든지 나가 살든지 택해라"까지 한 번 짚고 넘어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한편으로는 내가 정말 한심했다. 매번 어디 뒀는지도 모르면서 당장 거슬리니까 치우고, 정리한다고 버린 서류가 필요해져서 돈과 시간을 낭비하고도 버릇을 못 고치니 비난받아도 싸다고 자책하는 마음이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들어온 딸과 며칠 잘 지내던 어느 날 아침,

도시락 싸서 출근하려는 딸을 도와주려고 무화과 열매를 씻어서 썰어 넣어주는데 딸이 보더니 껍질에 묻은 게 뭐냐고 물었다.

"잘라내면 되잖아. 아보카도 자른 칼에서 묻은 것인가 보지"

그러자 딸은 "엄마, 엄마는 내가 말하는 포인트를 몰라."라며 화를 내었다.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고 자존심 뭉개는 소리에 나도 화가 났다.

"추측하거나 변명하려고 하는 거 싫어. 저번에 손세정제 치웠을 때도 안 치웠다고 하고 찾았을 때는 미안하다고 하지도 않았잖아. 궁금해서 물어보면 추측하지 말고 알아보려고 해야 되는 거 아니야?"

그러고 보니 그랬다.

상한 감정에 대한 두 가지 반응이 동시에 올라오면서 혼란스러웠다.

딸이 출근하고 난 후, 딸이 미운 건지 내가 미운 건지 모르는 채로 종이에다 상처의 진행과정을 적어 보았다.

그리고 빨간색 펜으로 '상처 - 상한 감정'과 '공격이냐 회피냐'의 사이에다 세로로 줄을 긋고 '인정'이라고 썼다. 상처 받으면 상한 감정이 생기는 것 까지는 막을 수 없지만 그다음 단계로 나가기 전에 힘들어도 추측하고 변명하는 나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스스로 인정한 것을 사람에게 말로 전할 때는 "미안하다. 말해줘서 고맙다. 다음에 또 그럴 확률이 많으니까 그때 말해다오"라고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인정'이라는 단어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학창 시절에 좋아했던 앨튼 존의 'So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d'라는 노래가 마음에서 들려왔다.


https://youtu.be/c3nScN89Klo


어떻게 하면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까를 노래 한 것 같다.

상처를 주고 받으면서 결국 관계가 끝나는 시점에서 미안하다고 해야 한다면 입이 떨어지지 않을 것이고

상대가 미안하다는 말을 받아주면서 서로 다시 회복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를때도,

아니면 유구무언이라 미안하다는 말조차 하기 힘든 경우에도 진심 어린 Sorry는 하기 힘들다.


그래도 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

미안하다는 말과 마음을 받아주는 것은 상대방의 영역이고 권한에 있는 것이지만

인정하고 미안하다고 하는 것은 내 영역에서 상처의 진행을 막을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위해서 미안하다고 하고 상처를 거부해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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