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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쿠르 코치 김지호 Oct 21. 2023

당신은 어떤 순간을 낚아챌 것입니까?

파쿠르는 ‘길’이다. 그 누구도 아닌 자기자신이 내딛는 길이다. 수 많은 장애물로 가득한 세상에서 자신의 길을 개척해야하는 과정은, 인간이 거쳐가는 전반적인 삶의 여정에 대한 호기심과 비판적인 문제의식을 지닐 수 밖에 없다. 결국 파쿠르는 인간 스스로에 대한 질문이고, 인간이 그리는 길에 대한 사유다. 

누구나 한 번쯤은 이런 질문을 스스로 해본적이 있다. ‘나는 왜 태어났을까?’ ‘나는 누구인가?’


명료한 질문임에도 답은 간단하지 않다. 어린시절, 부모님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아는 지혜로운 현자처럼 보였으므로, 망설임없이 물어보았지만 등짝 스매싱과 함께 쓸데없는 생각으로 치부되었다. 친구들에게 물어보면 순진하리만큼 간단하게 대답했다. ‘어머니가 낳아주셔서 내가 태어났어!’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고, 인간을 창조하고, 부모님 덕분에 내가 태어났지!’ ‘빅뱅으로 우주가 탄생하고 지구에서 최초의 생명이 진화를 거듭한 뒤 여기까지 왔지!’  


진리를 탐구하는 수 많은 사람들이 내놓은 인문, 종교, 철학, 역사, 과학 등의 학문의 영역에서도 각자의 이유, 각자의 방식으로 인간의 존재근거를 내놓는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 약한 자아를 지닌 어린이는 확신을 갖고 말하는 어른들의 말과 오랫동안 전승되어 온 경전의 무게에 압도되어 그것이 진리일 것이라고 믿고 따른다. 믿으면 불안할 때 의존할 수 있는 어른들, 텍스트와 추상의 존재가 있으니 마음이 편해진다. 그러나 뿌연 연기 속을 방황하는 것 처럼, 여전히 나의 존재이유에 대한 근거는 명확하지 않다. 


인도에서 누가 처음 0을 발견했을까? 그는 분명 ‘나는 왜 태어났을까?’라는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주관적 질문에서 출발하여 0의 발견을 통해 인류가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표현을 찾았음이 틀림없다. 아무것도 없음을 나타내는 0의 표현 덕분에 0으로부터 온갖 것들의 숫자들이 들어갔다 나가고, 태어나고 죽는다. 인간도 태어난 이유가 없기 때문에 온갖 것들의 존재근거들이 탄생하고 수 많은 생각들이 세상의 변화에 적응하며 생태계를 이루는 것이 아닌가. 


‘나는 왜 태어났을까?’ ‘나는 누구인가?’ 질문으로 돌아온다면, 답은 ‘없다.’ ‘없다’는 답도 없다. 없음으로 해서 이 질문은 시공간을 거슬러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던져지는 질문이며, 답 또한 누구에게나 열려있을 수 있다. 그렇기에 이 질문은 매 순간 ‘현재’에 생성되는 동시에 소멸하는 질문이고, 과거와 현재, 미래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자신을 확인할 수 있는 마법같은 주문이기도 하다. 


인간은 세상에 아무 이유 없이 던져진 존재다. 그래서 살아있는 동안 끊임없이 불안하고, 불안하기 때문에 자신의 의미와 가치를 창조하려 분투한다. 모든 생명은 유한하다. 인간도 그것을 거스를 수 없기에 죽음 앞에서 스스로의 존재와 삶이 무의미하고 허무해진다. 그러나 허무하고, 무의미 하다는 것은 정해진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한계 없이 자유로운 존재임을 반증한다. 인간은 누구나 그 스스로 무엇이든 상상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다. 


한 때, 인간에게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주어졌던 시절이 있었다. 태어나보니 노예의 딸, 대장장이의 아들, 귀족의 자제, 왕손 등 인간 스스로 일궈온 계급, 혈통, 수 많은 직업, 책임, 역할의 무게들. 뿐만 아니라 세상의 존재근거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신’을 인간보다 위에 두었던 시절도 길었다. 자신의 존재근거가 확실한 세계에서 자유는 없을 지언정 마음과 생각은 편했으리라. 이와는 반대로 현대인들이 겪는 우울과 방황, 불안은 존재근거를 스스로 찾아내야만 하는 자유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인간은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고, 모든 것은 변화하기 때문에 의존할 수 있는 영원불멸의 무언가를 끝없이 갈구하고,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제도와 문화, 관습을 만들어 왔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죽음의 공포에 대한 면역체계를 기르기 위해 온갖 것들을 상상하고, 만들고, 믿었다. 자신의 존재근거를 찾는 행위는 죽음에 대한 면역체계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이다. 면역체계를 만들 수 있는 권한이 과거에는 제사장, 왕, 신에게 있었다면 현대는 자본가, 자본주의에 있지만 상대적으로 현대인 스스로에게 주어졌다. 결국 누구의 길이 아닌, 자신의 길을 가야한다.


여기까지 왔다면, 이제 자신의 진로에 대한 사유를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 모든 직업들은 시대의 물살과 흐름에 변화한다. 영원한 직업은 없다는 사실만이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온갖 직업을 탄생시키는 동시에 소멸시키는 0에 가까운 본질은 있다. 그것은 바로 어떤 보상을 바라지 않고 순수하게 자신이 좋아서 하는 일, 무상한 행위로부터 온갖 직업들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의심스러운가? 나는 그것을 몸으로 직접 증명했다. 


나는 파쿠르로 어떤 직업과 돈을 벌기위해 시작한 것이 아니라, 파쿠르 그 자체를 좋아해서 시작했다. 서울역 길거리에 나앉아더라도 파쿠르를 할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즐겁고 행복하다.  이 마음가짐은 18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좋아서 시작한 일은 어떤 고난과 역경이 닥쳐도 즐길 수 있고, 성공과 실패의 결과에 연연하기 보다는 과정 자체에 몰입할 수 있다. 


그렇게 파쿠르를 연습하는 자체를 즐기다보면 자연스럽게 실력이 쌓이고, 탁월함에 이른다. 탁월함(Ethos Anthropos Daimon)은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어떤 것과도 연결될 수 있는 힘을 지닌다. 파쿠르를 좋아서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파쿠르 코치, 파쿠르 선수, 파쿠르 안무가, 파쿠르 무용수, 파쿠르 스턴트맨, 파쿠르 인플루언서, 파쿠르 크리에이터, 파쿠르 체육관 사업, 파쿠르 신발 사업, 파쿠르 커뮤니티 빌더, 파쿠르 이벤트 기획자 등 수많은 직업들을 거쳐갔다. 보상을 바라지 않고 순수한 동기에 의해 수련한 힘은 되려 보상이 따라오게 만든다. 


탁월함을 향한 자신의 길에 몰입하지 않고 보상을 위해 좋아하는 일을 타협하는 것, 내가 아닌 타인이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은 자기 스스로에게 짓는 죄이자 타락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 생계문제 등 이런저런 핑계로 가야할 길을 유예시키는 것은 결국 영원한 직업은 없기 때문에 더 큰 현실적인 위험으로 자신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삶의 안정감과 좋은 진로는 누군가가 짜놓은 틀, 판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새로운 틀과 판을 짜는 데에 있고,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틀과 판을 짜야하는 의무로부터 해방될 수 없다. 단지 그것이 두렵기 때문에 회피함으로써 의무가 유예될 뿐이다.  


당신이 스스로 좋다라는 느낌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당신의 시선과 욕망이 외부로부터 주어져있다면, 그 어떤 순간을 경험하더라도 당신은 스스로 ‘좋다’라는 느낌을 얻기 어려울 것이다. 좋음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들려오기 때문이다. 좋음이란 매우 사적인 경험이기 때문에 때로는 타인들로부터 이해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내게는 파쿠르가 그랬다. 파쿠르가 너무 하고 싶어서 계속 상상하고, 파쿠르를 연습하는 과정이 즐거워서 지칠 줄 모르고 움직였다. 나 스스로는 파쿠르가 이렇게 좋다는 것을 아는데, 다른 사람들은 무관심할 뿐더러 아무리 설명을 해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려면 큰 용기가 필요하다. 주변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거나, 심할 경우 이질적인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폭력을 행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극한의 상황에서도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순교’다. 지금도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른다면 그것이야말로 자신에게 스스로 가하는 가장 큰 ‘죄악’일 것이다. 왜냐하면 ‘좋음’이란 외부에서 찾기위해 노력해야할 대상이 아니라, 이미 자기자신이 가지고있는 것이이기 때문이다. 단지 자신의 심연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살핀적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눈이 항상 자기 밖으로 향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보물을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없다면, 좋아하는 것을 찾기 위해 바삐 무엇을 하려하기 보다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해야 한다. 하는 것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운 일일 뿐더러, 좋아하는 일은 0과 같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확인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게 시간이 주어진다면, 나는 가장 먼저 나의 심연을 살필 것이다. 심연 속에서 모든 것들의 가능성들이 싹트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면서도 보이는 모든 것들이 태어나는 곳. 그곳이 바로 심연이다. 심연으로 깊숙히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시야와 자신의 공간을 스스로 응시해야한다. 마치 성문 앞에 선 자신을 독수리가 된 또다른 ‘나’가 관찰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때때로 눈과 귀, 그리고 말들이 세상을 향해 있지만, 이때만큼은 내면으로 갈무리해야 한다. 


자연은 우연의 연속이다. 과학은 우연을 최소화 하려하지만, 과학조차 예측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으로 가득한 곳이 바로 자연이다. 나는 우연히 한국에서 태어났고, 우연히 누군가의 부모 밑에서 자랐다. 나는 우연히 영화 <야마카시>를 봤지만 나는 그 우연을 낚아챘다. 그 순간을 낚아챔으로써, 그저 의미 없이 지나갔을 여러 우연의 순간들 중 하나가 의미있는 시간적, 공간적 전환점으로 재탄생했다. 나는 이것이 인간이 가진 가장 위대한 힘이라 생각한다. “매 순간, 우연처럼 지나치는 갈래길에서 당신은 어떤 순간을 낚아챌 것입니까?”


나는 순간을 낚아챌 수 있는 힘이 갑자기 생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힘은 과거로부터 비롯된 경험과 현존재, 그리고 앞으로 무언가 되고 싶은 자기 자신에 대한 욕망 사이에서 깊은 관계가 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내가 우울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컴퓨터 중독자가 아니었더라면, 내가 초등학생 시절 친구들과 모험놀이를 즐겁게 하지 않았더라면, 자유롭고 싶은 희망을 갖지 않았더라면 영화 야마카시는 그저 여러 영화 중 하나였을 수도 있었다. 당신의 과거와 그리고 당신의 현재, 미래의 욕망이 연속된 우연 중 하나를 낚아챌 것이다. 그 순간들이 축적되면 그것이 바로 당신의 운명,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필멸자로서 자신의 길이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자신에게 알맞은 진로를 찾고자한다면 아무런 대가와 보상을 바라지 않는 0에 수렴하는 일, 남이 좋다고 말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 비록 당장 눈앞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지라도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에서 울려나오는 ‘좋음’을 신뢰한다면 세상의 모진 변화에도 적응할 수 있는 탁월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실체가 없는 행복을 추구하는 것보다 자신에 대한 신뢰로부터 울려퍼지는 심연의 파동이 당신의 삶의 질과 양을 확장시켜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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