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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지아나 Oct 14. 2022

‘일하는 나’를 잠시 멈추기로 했다

프롤로그

“이제 더 이상 일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 같아요.”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게 될 줄 몰랐다. 그만큼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일하는 10년이란 시간 동안 힘들 때도 많았지만 일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 건 처음이었다. 어느 날부터 한 걸음도 더 내딛기 어려웠다.


‘왜 이 일을 해야 하지?’,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지?’ 같은 질문에 답할 수 없었다.


결국 10년 동안 익숙해진 ’일하는 나’를 내려놓아야 했다.


무서웠다.




왜 이런 일이 생긴 걸까.

처음부터 잘못된 선택을 한 걸까?

앞으로 어떻게 먹고살지?


나는 내가 하는 일이 좋았다. 그래도 힘에 부칠 때면 며칠 연차를 써 짧은 자유를 누렸다.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마음을 다잡기도 했다. ‘일하는 나’의 삶을 연장하기 위한 일종의 심폐소생술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영혼 없는 빈껍데기 상태로 출퇴근하는 날이 지속되면서 몸과 마음, 모두 성한 곳이 없었다. 내 삶에서 점점 내가 사라지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지난 10년간 열심히 달리던 트랙에서 내려왔다. 올해 3월 어느 날이었다.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지경에 다다라서야 일을 내려놓았다. 1년 넘게 지속된 번아웃 때문이었다. 그래도 회사를 그만둘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아닌 내가, 아무 계획 없이 퇴사할 거라곤 상상조차 한 적 없었다.


모든 것이 불분명한 상황에서 확실한 건 단 두 가지였다.


내가 지금 많이 지쳐있다는 것.

그래서 몸과 마음을 돌볼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이런 상태에서 이직이나 창업을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앞으로 더 오래, 건강하게 일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진정한 나를 찾는 시간, 정말 내가 원하는 선택을 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다. 스스로 삶의 주인공이 되어 ‘현재’를 살고 싶었다.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불안해하며 살고 싶지 않았다.


다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진짜 나’를 찾는 이 시간을 어떻게 설명할지 난감했다. 나조차도 납득하기 어려웠으니까. ‘다들 이렇게 사는데 나만 못 버티고 포기한 건 아닐까’하는 생각에 잠 못 이루기도 했다.




『파친코』를 쓴 이민진 작가는 젊은 시절 건강상의 이유로 다니던 로펌에서 퇴사한 후 무려 3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소설을 완성했다. 그녀는 최근 이 소설의 새 출간 기념 북토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생은 불공평합니다. 그럼에도 인생의 게임을 계속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상적으로는 도덕성과 선량함, 친절한 의도를 갖춰야 하지만 게임을 계속하는 것 자체가 매우 중요해요.



‘내게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라는 생각에 빠져 무기력하게 하루를 보낼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는 끝까지 해봐야 안다. 지난 10년의 직장생활이 끝났다고 내 인생까지 끝난 건 아니었다. 미리 포기하지 않고 한계 짓지 않으며 내 속도에 맞춰 그저 하루를 살아가는 것. 다행스럽게도 그것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다.


예상치 못했지만, 충분히 많은 자유 시간이 내게 주어졌다. 나는 이 시간을 ‘두 번째 갭이어’라 부르기로 했다. ‘일하는 나’로 10년을 살다 맞이한 시간이었다. 어쩌면 학창 시절의 갭이어보다 더 많이 경험하고 새롭게 진로를 탐색하며 삶을 살아갈 에너지를 축적하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어떤 것이든, 그리고 무엇이든 해볼 수 있는 ‘가능성의 시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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