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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지아나 Oct 14. 2022

일하는 사람에겐 ‘갭이어’가 필요하다

나의 ‘두 번째 갭이어’가 시작되었다

보그 코리아 조소현 에디터는 「일하는 사람에겐 ‘갭이어’가 필요하다」라는 글에서 ‘불가항력적 갭이어’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불가항력적 갭이어는 갭이어의 존재도 쓸모도 모른 채 일과 자신을 일체화해 내달리다가 번아웃에 도달해 솔루션으로서 접하는 경우다. (······)  나 역시 번아웃의 증상을 따라가다가 갭이어라는 단어에 도달했다.
 

일반적으로 갭이어란, 학업을 잠시 중단하거나 병행하면서 봉사, 여행, 진로탐색, 교육, 인턴, 창업 등의 활동을 체험하며 흥미와 적성을 찾고 앞으로의 진로를 설정하는 기간을 말한다.


영미권에서는 독립 시기가 빠른 만큼 고등학교 졸업 후 갭이어를 가지며 자신의 진로를 탐색하는 경우가 많지만, 경쟁이 치열한 한국에서는 갭이어도 취업을 위한 스펙 쌓기가 주를 이룬다. 남들이 하니까 하는 혹은 남들 따라 하는 배낭여행, 어학연수, 인턴 등이 그 예다.


나도 비슷했다. 대학 시절 유럽 배낭여행을 하고 어학연수와 인턴을 경험했다. 그래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렴풋하게나마 아는 계기가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진로를 계획했고 결과도 나쁘지 않았다. 졸업 후 몇 번의 탈락 끝에 좋아하는 분야의 공공기관에 최종 합격해 사회에서 제 몫을 해낼 기회를 얻었다. 그렇게 10년을 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일상에 더 이상 내가 존재하지 않았다. 나만 이런 게 아니라고, 사회생활이 원래 그런 거라고 애써 외면하며 무거운 짐을 마음속에 꾹꾹 눌러 담았다.

  

하지만 매일 절벽 위에 서 있는 기분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를 지탱해오던 단단한 끈이 한순간 툭 끊어진 느낌이었다. 올해도, 내년에도 계획한 적 없던 갑작스러운 퇴사를 하게 되었다. 대체 내게 왜 이런 일이 생긴 걸까.



     

명백하게 ‘불가항력적’이었다. 그저 10년 동안 열심히 달렸다. 업무 성과가 곧 나의 성과라고 여기고 일했다. 일과 나는 운명공동체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를 보여줄 수 있는 건 내가 하는 일밖에 없었다. 결국 명함이 없으면 나를 증명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는 ‘아무나’가 되고 말았다. 그토록 경계하던 일이었음에도.


잠시 멈춰 서서 내가 왜 사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잘하는지 알아보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 시간은 이직이나 창업, 프리랜서로 전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나를 위한 것이어야 했다.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일하는 나’에서 잠시 벗어나 있기로 하며 가장 두려웠던 건 ‘회사에 다닐 때만큼 생산성 있는 삶을 살 수 있을까’하는 점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성은 ‘돈’이나 눈에 보이는 ‘결과물’처럼 유형의 물질로 측정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런 사회에서 생산성 없는 삶을 선택하기란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인가.


한국계로는 최초로 수학계 노벨상인 ‘필즈상’을 수상한 허준이 교수는 제76회 서울대학교 후기 학위 수여식 축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취업, 창업, 결혼, 육아, 교육, 승진, 은퇴, 노후 준비를 거쳐 어디 병원 그럴듯한 일인실에서 사망하기 위한 준비에 정신 팔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무례와 혐오와 경쟁과 분열과 비교와 나태와 허무의 달콤함에 길들지 말길, 의미와 무의미의 온갖 폭력을 이겨내고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길, 그 끝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는 낯선 나를 아무 아쉬움 없이 맞이하길 바랍니다.

20대는 취업을, 30대는 결혼과 육아를, 40~50대에는 승진과 노후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한다. 남들과 비교하며 그들과 비슷하면 안심하고 뒤처지면 끝이라는 강박 속에서. 하지만 그 끝이 어디 병원 그럴듯한 일인실이라면, 과연 후회 없이 눈을 감을 수 있을까?




나는 간절했다. ‘나다운 하루를 살고 싶다’는 마음이 그랬다. 그러려면 이미 지나온 ‘20대의 나’와 앞으로 다가올 ‘40대의 내’가 아닌, ‘현재’ 내 삶을 살아야 했다. 앞으로는 그렇게 살아야 할 것 같았다. 최선을 다해 일해 온 내게 잠시 쉬는 시간을 주고 싶었다. 그래야 앞으로 더 오래, 건강하게 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제야 비로소 나는 왜 내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어쩌면 잠시 멈춰선 지금이 또 다른 ‘생산성’을 위한 시간일지 모른다. 삶의 충만함을 느끼는 하루와 내가 좋아하는 것, 견딜 수 없는 것들을 알아가는 과정들. 이런 무형의 것들도 충분히 그만한 가치가 있을 거라고, 나는 믿는다.


(※제목은 보그 코리아 조소현 에디터의 「일하는 사람에겐 ‘갭이어’가 필요하다」를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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