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하기 1년 전부터 나는 모든 에너지가 바닥난 상태였다. 지속되는 무기력증과 냉소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결국 ‘일하지 않는 나’를 선택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일하는 나’로 살아온 지난 10년 동안 나는 일에 몰입하는 순간을 누구보다 즐겼다. 어려운 프로젝트를 맡으면 두려우면서도 한편으론 성장할 기회가 생겼다는 생각에 기뻤다. 무력감에서 벗어나고 싶어 책을 읽고 브런치에 글을 쓰며 자기 발견의 중요성에 대해 깨닫기도 했다.
그런 내가 ‘더 이상 무언가를 해낼 수 없다’는 좌절감에 빠져 있다니. 나답지 않았다.
나는 번아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무능력한 사람들이나 일하기 싫은 사람들이 둘러대는 핑계라고 생각했다. 각종 매체에서 직장인의 번아웃을 소재로 한 콘텐츠가 가볍게 소비된 탓도 있었다. 한동안 퇴근 후 밤마다 우울증, 만성피로, 스트레스, 불안 등의 단어를 검색했다. 그러나 어느 것도 내 증상과 완벽하게 들어맞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퇴사 후 내가 완전히 번아웃 상태였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번아웃의 본질에 대해 이해한 덕분이었다. 이번 글에서는 여러 자료를 통해 정리한 ‘번아웃에 대한 오해’와 ‘개인이 번아웃을 극복하기 어려운 이유’에 대해 설명하려고 한다.
번아웃은 단순한 ‘탈진’이나 ‘피곤함’이 아니다.
번아웃은 통상 과도하게 일에 몰입하던 사람이 신체적, 정신적 스트레스와 피로감을 느끼면서 무기력해지는 증상을 말한다. 1970년대 처음 개념이 제시된 이래 번아웃을 경험하는 사람이 점차 늘어나고 있으며, 이에 세계보건기구는 2019년 5월 번아웃을 직업 관련 증후군의 하나로 분류하고 국제질병분류기준에 추가했다.
1981년 UC 버클리대 심리학 교수인 크리스티나 매슬라크는 번아웃 상태를 정의하고 측정하기 위해 '매슬라크 번아웃 인벤토리(MBI)'라는 목록을 만들었다. MBI는 번아웃을 세 가지 측면에서 정의했는데, 1) 탈진(에너지 고갈), 2) 냉소주의, 3) 능률(무기력)이다.
이 세 가지 영역에서 모두 고위험군에 속했을 때만 번아웃에 해당한다. 한 가지나 두 가지 영역에서 부정적 점수를 받는 경우는 번아웃에 해당하지 않는다. 즉, 탈진이나 피곤함을 느낀다고 해서 모두 번아웃 상태인 것은 아니다.
또한 EBS 클래스 e 윤대현의 <스트레스 클리닉>에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윤대현 교수는 번아웃의 대표 현상으로 다음 네 가지를 제시했다. 바로 1) 무기력감, 2) 자신감 하락(직업 효능감 하락), 3) 이인증(비현실감 및 공감 에너지 하락), 4) 건망증이다.
(※ 이인증이란, 정신건강의학 용어로 자신이 낯설게 느껴지거나 자신과 분리된 느낌을 경험함으로써 자기 지각에 이상이 생긴 상태를 말한다)
그렇다면 번아웃은 질병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번아웃은 질병이 아니다. 세계보건기구는 번아웃을 국제질병표준분류기준에 포함했지만, 최종적으로 '질병'이 아닌 '직업 관련 증상'으로 정의한다고 밝혔다.
윤대현 교수 또한 번아웃은 병이나 질환명이 아니며 일종의 ‘상태’라고 보았다. 일하는 사람이라면 어느 순간 누구에게나 번아웃이 찾아올 수 있으며 오히려 열심히 살았다는 증거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마음이 힘들다고 자신에게 말을 건 것뿐이다. 그러니 내가 약하다고 생각할 필요도, 한심하다고 말할 이유도 없다.
개인의 힘으로 번아웃을 극복하기 어려운 이유
전문가들은 번아웃은 개인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번아웃의 시작은 개인일 수 있지만 그 원인은 개인에 국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상사나 동료와의 관계, 조직문화, 평가 및 보상 제도의 불합리 등 조직 차원의 문제가 번아웃을 심화시킨다.
이미 번아웃된 개인에게 상사와의 갈등이나 의미 없는 업무의 반복, 동료와의 소통 부재가 지속된다고 가정해보자. 거기다 개선 의지가 없거나 변화 속도가 느린 조직에 속해있기까지 하다면? 아마 자신이 바꿀 수 있는 게 없다는 생각에 점점 더 무기력해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번아웃에 시달리는 구성원에게 여행, 운동, 명상 등 개인 차원의 해결책만 제시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물론 잠깐 에너지가 회복될 수도 있지만 회사에 돌아가면 다시 번아웃에 빠지기 쉽다. 그만큼 환경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이 큰 것이다.
처음 무기력을 느꼈을 때, 나도 내가 노력하면 좋아질 거라 믿었다. 여행을 다녀오고 자기 계발을 하면 나아질 줄 알았다. 회사에서 도입한 EAP 프로그램으로 심리상담도 받아 보았으나 그때뿐이었다. ‘일과 삶의 균형’을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그러려면 일이 더 이상 내 삶의 중심이 되지 않아야 했지만 둘을 명확하게 분리하기란 불가능했다.
조직 개선과 관련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바꿀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문제를 공유하고 면담을 신청했다. 그러나 조직은 변하지 않았다.
결국 점점 더 짧은 주기로 번아웃을 겪었다. 회사 안에서도 밖에서도 나는 빈껍데기였다. 애정 없는 일을 붙잡고 회사에서 8시간씩 보내는 것도 못 할 노릇이었다.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고 조직이 변하길 기다릴 수도 없었다.
그야말로 사면초가의 상황이었다.
(※ 다음 글에서 ‘일하는 사람의 ‘번아웃’ (2)가 이어집니다)
<번아웃 자가진단법> (매슬라크 번아웃 인벤토리(MBI))
(영역 1) 탈진
1. 나는 직장에서 진이 빠진다.
2. 직장 사람들과 온종일 일하는 건 꽤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3. 업무가 나를 망가뜨리는 것 같다.
4. 나는 업무 때문에 좌절을 느낀다.
5. 나는 너무 열심히 일하는 것 같다.
6. 사람들과 직접 접촉해서 일하는 건 나에게 큰 스트레스다.
7. 밧줄 끝에 매달려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영역 2) 냉소주의
1. 나는 업무상 대해야 하는 사람들이 물체처럼 느껴진다.
2. 나는 아침에 일어났을 때 피곤하고 매일 내일 또 출근일을 맞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3. 나는 업무상 대해야 하는 사람들이 나에게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달라는 책임감을 준다고 느낀다.
4. 나는 업무가 끝날 때 내 인내심이 다다랐다고 느낀다.
5. 나는 업무상 대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관심 없다.
6. 나는 일한 이후로 사람들에게 무관심해졌다.
7. 나는 이 일이 나를 무정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 같아 무섭다.
(영역 3) 능률
1. 나는 일하면서 많은 가치 있는 것들을 이룬다.
2. 나는 에너지가 가득 차 있다.
3. 나는 업무상 대해야 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게 뭔지 쉽게 이해한다.
4. 나는 아주 효율적으로 업무상 대해야 하는 사람들의 문제를 다룬다.
5. 나는 업무 중 감정적인 문제를 고요히 잘 다룬다.
6. 나는 일을 통해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느낀다.
7. 나는 업무상 대해야 하는 사람들과 있을 때 쉽게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 수 있다.
8. 나는 업무상 대해야 하는 사람들과 있을 때 기분이 좋아진다.
※ 전혀 아니다(0), 1년에 몇 번 그렇다(1), 한 달에 한 번 그렇다(2), 한 달에 몇 번 그렇다(3), 1주에 한 번 그렇다(4), 1주에 몇 번 그렇다(5), 매일 그렇다(6)
※ 영역 1 ▲17점 미만: 이상 없음 ▲18~29점: 경증·중등도 ▲30점 이상: 고위험
※ 영역 2 ▲5점 미만: 이상 없음 ▲6~11점: 경증·중등도 ▲12점 이상: 고위험
※ 영역 3 ▲33점 미만: 고위험 ▲34~39점: 경증·중등도 ▲40점 이상: 이상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