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현대인
자살률과 우울증 증가 같은 암울한 통계를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일상에서 무력감을 느끼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언론에서는 하루가 멀다고 안타까운 사건·사고 소식을 전하고, 어린이부터 청소년, 어른들까지 모두가 힘들다고 말하죠.
생산성과 효율화가 최우선 가치가 되면서 소모되고 탈진했다고 느끼는 사람이 정말 많아졌어요.
‘왜 지금 공부를 하는지’,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에서 출발한 의문은 결국 ‘왜 사는지’로 이어지고, 의미 상실로 귀결됩니다. 마치 전 세대에서 번아웃이 전염병처럼 돌고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이런 시련이 닥친 이유는 무엇일까요?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괴로워하는 우리에게 과연 희망은 있는 걸까요?
의미의 붕괴
과거 우리의 삶은 종교와 전통에 의해 유지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정해진 규범과 자신보다 앞선 세대의 삶을 따라 살면 그만이었어요. 예측할 수 있는 삶은 어떤 선택이나 결정에 대한 고민거리를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과학이 발전하면서 기존 사회 질서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현대인에게 종교와 전통은 더 이상 예전만큼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죠.
초자연 세계에 대한 믿음, 공동체 의식 같은 전통 규범이 약해지면서 사람들은 점점 더 길을 잃고 헤매게 되었어요.
불확실하고 예측할 수 없는 삶은 절망과 고통이란 감정을 증폭시키고, 우울증과 자살 증가라는 안타까운 결말로 치달았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무력감을 느끼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면서 인간은 동물적인 본능 일부를 잃게 되었어요.
본능에 따라 사냥하고, 먹고, 자고, 종족을 번식하는 형태에서 자연스러운 반응을 제어해야 하는 형태로 진화하면서 우리는 자기 앞에 놓인 수많은 선택지 중 한 가지를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지, 그 결과가 어떨지 예측할 수 없는 상태는 불안함을 가중할 뿐이죠.
내 삶이 공허한 이유
종교와 전통의 해체, 본능의 통제 같은 ‘사회적 요인’에 더해 다음의 '개인적 요인’ 또한 우리 삶을 공허하게 합니다.
첫째, ‘외부에 의존하는 마음’입니다. 외부에 의존한다는 건 결국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에 나의 행복을 맡긴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직장인의 번아웃을 예로 들어볼까요? 직장, 조직문화, 상사의 기분 같은 외적인 요인에 의해 좌우되는 나의 하루를 상상해 보세요. 소중한 나의 일상이 ‘내’가 아니라, 상대의 말, 태도, 기분 등에 따라 나는 기쁘기도, 슬프기도, 화가 나기도 하겠죠.
내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을 기준으로 삼을수록 나는 점점 더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외부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겠지만,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집착은 일상을 피폐하게 만들 뿐입니다. 제가 번아웃을 겪은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고요.
이럴 때 우리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감을 느끼고, 결국 수동적으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둘째, ‘나의 감정에 대한 소홀함’입니다. 어렸을 때와 달리 어른이 된 저는 제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어느 순간부터 감정을 묻는 말에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그냥”으로 뭉뚱그려 대답하는 경우가 늘어났고요.
감정을 표현하는 일이 어색하고, ‘내 기분이 어떤지 세세하게 표현하고 설명하는 일이 중요한가?' 하고 생각하기도 했어요. 일상에서도 효율성과 생산성을 따지고 있었던 거죠.
아무래도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내 생각보다는 리더의 의견을 따르는 경우가 많고, 그럴 때 사회성이 뛰어난 사람으로 여겨지다 보니 감정을 숨기는 일이 익숙해진 건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유일하게 나를 바라봐 주는 존재인 내가 나의 감정을 외면한다면, 누가 알아줄까요? 감정을 외면할수록 무기력과 공허함을 느끼고, 마음은 점점 더 번아웃이 자라기 쉬운 환경이 되어버립니다.
제가 일상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깨달은 점이 있습니다.
바로 희로애락의 감정에는 아무 잘못이 없고, 그런 나의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해도 괜찮다는 거예요. 어쩌면 과거의 저는 감정이 주는 자극이 버거워 일부러 더 '회사 인간'이라는 역할에 몰입했는지도 모르겠어요.
다음의 내용을 잊지 않고 꼭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1) 외부(타인, 일 등)에 의존하는 마음 →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나'에 집중
2) 나의 감정을 홀대하는 마음 → 풍부한 감정 경험을 쌓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의미는 만드는 것이 아닌 '발견하는 것'
공허한 삶에서 의미 있는 삶으로 나아가는데 가장 큰 걸림돌은 해결되지 않는 다음의 질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도대체 삶의 의미가 뭐지?'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 거야?'
'내가 의미를 찾겠다고 결심하면, 찾을 수는 있는 걸까?'
이에 대한 답은 나치 수용소에서 부모님과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홀로 살아남은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을 통해 얻을 수 있었어요.
그는 수용소의 혹독한 환경 속에서도 풀리지 않는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연구에 몰입합니다.
최악의 상황에서 왜 누구는 자살을 선택하고, 누구는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가?
실제로 그 자신을 비롯해 살아남은 사람에게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로 삶에 대한 의지, 즉 '의미'가 있었죠.
그는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을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의미 치료(로고테라피)를 창시한 후, 삶의 의미를 잃은 많은 환자에게 도움을 주었지요.
빅터 프랭클은 삶의 의미는 만드는 것이 아닌, 발견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중요하며,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하는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는 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요.
그럴 때 우리는 나치 수용소같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올바른 답을 찾고, 내 앞에 놓인 과제를 수행하는 책임을 지며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이지요.
그러니 '의미있는 삶'이란, 단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도, 일괄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정답이 있을 수도 없습니다. 사람마다, 때마다 다르죠.
얼마 전 읽은 김지수 기자의 양희은 님에 대한 인터뷰에서 ‘의미 있는 삶’에 대한 힌트를 발견했습니다.
언제 가장 행복하세요?
오랜 연륜으로 무심한 다정함과 여유로움을 품은 가수는 다음과 같이 답합니다.
“일상을 충실히 살아내면... 행복은 멀리 있지 않더라고요. 요즘엔 집 근처 단골 목욕탕에서 목욕할 때, 불투명한 창으로 빛이 스며들면 그게 얼마나 행복하고 개운한지 몰라요. 변함없이 살아내는 하루하루가 다 노래가 되더라고요. 예쁜 종지 하나가 깨졌다, 된장찌개가 보글보글 맛있게 끓었다... 그런 게 다 하루하루의 노래였어요.”
행복이 일상에 있다면, 삶의 의미 또한 내가 사는 충실한 삶 속에서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요? 먼 곳에 있는 대단한 어떤 게 아니라요.
나의 일상에 몰입하여 순간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느끼는 때야말로 행복의 순간이며, 살아갈 이유를 느끼는 순간입니다.
양희은 님이 말하는 ‘하루하루의 노래’란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삶의 무의미함과 공허함 때문에 힘들다면, 지금 내 삶에 주어진 질문에 답을 해야 할 때임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그런 후 나답게 답을 찾고 다시 걸어가시길 바랍니다.
쉽지 않지만, 그래도 해보겠다는 마음, 이번 생에 나의 삶의 의미를 반드시 찾겠다는 마음으로 함께 걸어보지 않으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