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로 알려진 ‘노르웨이의 숲’을 군대에서 읽었었다. 하루키의 소설을 처음 접한 것인데 엄청나게 내 취향은 아니었다. 주인공이 뭔가 흘러가는 대로 사는 인상을 받기도 했고 연애소설이면서도 시대적인 ‘냉소’ 등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하루키를 비판하는 지인에게서 들었던 것 같은데 어떤 작품이든지 섹스가 항상 나온다고 했다. 기억 상 노르웨이의 숲도 정사장면을 많이 묘사했던 것 같다. 재미가 없지는 않았다. 술술 읽히는 문체이기도 했고 당시 일본 사회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하루키는 노르웨이의 숲이 출간될 당시 대학생이었던 필자의 위 세대가 더 좋아했을 법한 작가임엔 틀림없는 것 같다. 공감할 부분이 그들보단 적을 테니. 토니 타카타니는 하루키가 쓴 단편소설을 영화화한 것이다. 영화는 재즈 트롬본을 다루는 타카타니 쇼자부로라는 인물의 일생으로 시작한다. 태평양 전쟁 시작 전에 쇼자부로는 여자 문제로 일본을 떠나 중국 상해에 도착한다. 당시 거의 모든 일본인이 겪었던 태평양 전쟁에서 벗어난 쇼자부로는 상해의 나이트클럽에서 트롬본을 불며 지냈다. 사회성과 악기 연주 실력은 어디든지 그가 적응할 수 있게 해준 자산이었다. 패전 후 전범 의심을 받아 형무소 생활도 했지만 용케 살아서 일본으로 돌아온다. 그는 일본에서 결혼을 하고 아들을 낳는데 그가 이 영화의 주인공인 토니 타키타니다.
영화의 제목이자 주인공의 이름인 ‘토니 타키타니.’ 말 그대로 일본어와 영어를 조합해 만든 이름이다. 쇼자부로의 지인이었던 미국인 소위의 제안으로 이름을 붙인 것인데 “미국의 시대가 이어질 테니 편리하겠지.”라는 이유로 지었던 것이다. 혼혈의 이름을 가졌지만 백인의 피가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토니는 그렇게 시작부터 고독과 친해지기 좋았다. 학교에서 혼혈아라고 놀림을 받았고 어머니는 자신을 낳고 사흘 후에 죽었다. 혼자 지내는 생활에 익숙했다. 토니는 일본 68 혁명세대와 다른 길을 걷는다. 기계와 같은 정교한 것들을 그리는 것에 익숙했고 그림과 예술에 정치·사상과 같은 것들을 부여하지 않았다. 재능은 있었기에 유명한 일러스트가 되어 재산도 꽤 축적했다. 영화는 이 부분까지 잔잔하게 흘러간다. 솔직히 배경음악이 없었다면 잔잔함보다 지루함이 훨씬 컸을 것이다. 류이치 사카모토가 참여한 ‘고독’이라는 배경음악이 너무 좋아서 끊지 않고 계속 보게 것도 있다. 카메라의 움직임은 그를 멀리서 관찰하듯이 천천히 그리고 흐릿한 실루엣으로 담아낸다. 넓고 깔끔한 상류계급의 집안에서 작업에 몰두하는 그의 모습은 ‘고독’이라 불리는 것이 너무도 익숙하고 일상적이라 고독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 내에서 계속 등장하는 시점이다.
그랬던 그에게 집으로 찾아온 출판사의 아르바이트 사원은 ‘고독’을 해소해 주는 존재였다. 토니는 그녀의 외모와 스타일에 반했고 그의 솔직한 고백은 둘을 결혼까지 이끈다. 결혼 전에 여자가 말한 “옷을 너무 좋아해서 월급도 다 써버려요.” 는 예상대로 복선이었다. 결혼 후에 아내는 ‘쇼핑중독’과 다름없이 눈에 띄는 옷들을 다 사버린다. 토니의 안정적인 물질적 기반이 그렇게 만든 것일까. 토니는 고민 끝에 아내에게 ‘그렇게 비싼 옷들이 많을 필요가 있을까.’라는 말을 꺼내고 아내 역시 그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진 않기에 쇼핑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한다. 여기서 뭔가 ‘극심한 갈등이 일어나는 것인가..!’ 라며 조마조마했는데 아니었다. 아내는 옷들을 반품하러 부티크에 갔지만 돌아오는 길에 반품한 옷들이 눈에 아른거린다. 초조한 눈동자로 운전대를 잡고 있는 인물들의 클리셰를 꽤 많이 봐왔기에 ‘설마..’하고 봤는데 설마가 맞았다. 전형적인 교통사고 신의 효과음과 함께 그렇게 아내는 세상을 떠난다. 고독이라는 녀석은 잠깐 휴가를 갔다 온 것처럼 다시 토니에게로 돌아왔다. 토니는 그렇게 다시 혼자가 됐다. 아내와 같은 신체사이즈, 외모의 비서를 고용하고 그녀에게 아내의 옷을 입고 출근해달라는 괴상한 요구를 한다. 그녀는 돈이 필요했고 토니가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아 보였다. 아내의 옷 방을 보고 생각한다.‘이렇게 많은 예쁜 옷을 입고 죽어버리다니..’ 토니는 아내의 ‘옷’을 입은 사람은 아내가 아니란 것을 깨달았던지 제안을 번복한다. 유일한 가족이었던 쇼자부로는 많은 레코드판을 남기고 간암으로 죽는다. 쇼자부로의 유품과 아내의 유품을 불에 태우거나 팔고 정리했다. 토니는 철저히 혼자가 되었다. 첫 장면에 쇼자부로가 형무소 독방에 고독하게 갇혀있는 장면과 토니가 아내의 빈 옷 방에서 아내를 그리워하는 장면이 겹쳐지며 영화는 끝난다.
소비주의와 나의 옷장 그리고 고독
하루키 작품의 특징인 걸까. 무채색. 담담함. 고독함, 냉소 등의 이미지들이 영상으로 표현된 느낌이다. 악마와 계약한 파우스트, 죄와 벌의 로쟈, 그리스인 조르바와는 다른, 고전문학 속 뚜렷한 개인의 서사와는 정반대에 서 있는 느낌이라고 보면 되려나. 일상적이지만 파편화된 개인의 이야기들이다. 일본 전공투의 실패와 경제성장, 한국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90년대 포스트모던 담론의 등장. 이런 정치·경제적 상황은 상관관계가 어느 정도 있는 것 같다. 경제 성장과 다양한 영역에서의 소비주의는 근대가 만들어낸 ‘주체’와는 거리가 멀다. 영화, 만화, 게임, 패션 산업에서의 세계화·다원화 흐름은 개인의 일상 속에 스며들었고 각각의 욕망을 투사하고 해소시켰다. 그때부터 2020년인 지금까지 소비 사회는 지금까지도 강화된 쪽에 가깝지 결코 줄어들었다고 볼 수 없다. 전자기기의 발달은 소비 사회 촉진에 엄청난 박차를 가했다. 스마트폰은 소비의 영역을 확장시켰고 영상 플랫폼의 확장은 어디서든 전 세계의 문화를 보고 싶을 때마다 볼 수 있게 했다.
필자는 토니의 아내가 ‘옷을 보면 사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 없다. 마치 중독처럼.’이라고 한 부분에서 공감 가는 부분이 많았다. 필자는 군 입대 전에 ‘가성비’를 모든 옷 쇼핑의 최우선 순위로 생각했다. 옷에 관심이 없기도 했고 물질적인 여건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전역 후에 꽤 많은 시간의 아르바이트를 했고 전보다는 여유가 생겨 옷에 관심도 가지게 되었다. 옷장엔 조금만 옷에 관심이 있었다면 결코 입지 않을 옷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당시에 사귀었던 연인들은 ‘외면보다 내면을 보는 사람인 게 틀림없어’ 할 정도로 말이다. 옷에 투자를 하기 시작한 후 적당한 소비는 없었다. 소위 ‘무난한 아이템’들을 사기 시작했는데 그 범위가 전혀 ‘무난하지’ 않았다. 계절별로 신발, 옷, 외투 모두 다 달랐고 가격도 괜찮은 국내 브랜드를 찾아봤는데 20살에 사던 보세 쇼핑몰보다 몇 배는 비쌌다. 모든 아이템이 합리적인 퀄리티를 가지진 않았으나 전보다는 확실히 괜찮았다. 그래서 돈이 아깝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명품으로 옷장을 진열한 토니의 아내에 비할 바는 아니더라도 그 마음이 이해는 간다. 아끼는 옷은 아주 잘 개어 놓고 세탁도 신경 써서 했다. 주말에는 옷을 다리거나 옷장 정리를 하고 뿌듯해하기도 했다. 사고 싶은 옷이 있는데 사지 못했을 경우 토니의 아내처럼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경우가 있다. ‘옷을 못 사서 일상생활에 방해가 되니까 사는 게 좋겠다.’ 라며 합리화를 했고 쇼핑몰의 적립금과 쿠폰 등을 총동원해서 나름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가격에 구매했을 때의 기분이란!
옷은 한번 관심 가지면 여러 스타일에 도전해보려는 심리도 생길뿐더러 예쁘지 않다고 생각했던 아이템들이 예뻐 보이기도 한다. 이 부분은 패션의 이미지 소비 측면에 더 관련이 있는 것 같다. 패션 유튜버들, 연예인들이 뭔가 애매하거나 과한 디자인(?)의 아이템을 입기 시작하면 갑자기 그 해의 유행이 되기도 한다. 지드래곤이 콜라보로 만든 나이키 ‘피스 마이너스 원’이라는 신발도 개인적으로 그렇게 예쁜가 싶었는데 출시되자마자 홍대 거리가 마비될 정도로 줄을 서 있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필자의 한 가닥 남은 소비주의 사회에서 ‘합리적인 개인 되기’에 대한 욕구인지 내 눈엔 안 예쁜데 연예인이 입어서 유행이 된 아이템은 아직 산 적이 없다. 그래서 옷장엔 무채색 계열의 옷들과 청바지만 색깔별로 한 가득이다. 패션 소비에 몰두한 지 거의 반년이 넘어서인지 전보다 옷을 사는 빈도는 줄었고 입는 스타일도 고정적이 되었다.
어쨌든 신자유주의 속 한국에서 개인은 파편화되기 쉬운 존재다. 소비 사회가 파편화의 원인인지 결과인지는 확실치 않다. 토니는 “정말로 그렇게나 많은 옷이 필요한 걸까?”라고 묻는다. 아내는 옷이 가지는 기능적 요소에 의미를 두지 않았다. 옷의 색, 감촉, 모양 등 그 자체를 사랑했다. 그게 자신의 욕망의 투영이고 해소였지 않을까. 새로운 옷이 눈에 들어오지 않게 집 밖으로 나가지 않던 그녀는 자신이 텅 비어버린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소비주의 사회에서 페티시즘에 빠지지 않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마르크스가 지적했듯이 화폐가 인간을 도리어 지배하는 것들이 이미 100년도 더 전부터 이야기되었으니 말이다. 더해서, 고독과 소비주의는 멀리 있지 않다. 현대 사회의 개인은 과거보다 더 다양한 인간관계를 접할 수 있는 시대임엔 틀림없다. 교통, 통신의 발전은 세계화라는 단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공허한 관계 속의 고독함 또한 소비주의의 개인이 짊어져야 할 자연스러운 것들이다. 토니에게 이름의 이질적임과 비슷하게 아내의 존재는 잠시나마 너무도 익숙했던 고독에서의 해방을 의미했다. 그러나 결국 아내와 아버지 먼저 세상을 떠나고 혼자 샐러드를 묵묵히 먹는 장면에서 고독은 피할 수 없는 것임을 보여준다. 하루키의 작품 속에 거창한 신념과, 영웅적인 서사가 없는 인물들이 등장함에도 인기를 끈 것은 동시대의 사람들이 비슷한 감정을 공유하고 있어서라는 생각도 든다. 그들은 ‘하루키 류’의 문학이나 영화를 소비함으로써 욕망을 채우고 고독함을 공유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