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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는 당뇨병 환자였다.

by 남동휘

내 나이가 50대 중반이었다. 하루는 서울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순천으로 내려오는데 소변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차가 시내로 접어든 후에 운전기사에게 차를 세워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다행히 운전기사가 차를 세워줘서 용무를 마칠 수 있었다. 예전에는 이런 일이 전혀 없었는데 몸에 이상이 생겼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음날 병원에서 진찰을 해보니 당뇨병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식전 혈당수치가 250이 넘었다는 말에 눈앞이 캄캄했다. 그동안은 정상인의 혈당수치가 얼마인지도 모르고 살아왔었다. 하늘이 노랗고 땅이 꺼지는 느낌이었다. 어찌할 바를 몰라서 병원에서 처방해 주는 약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본인의 병에 대한 지식 없이 처음 진단받고 올 때의 무력감을 뭐라 설명할 수 없었다. 돌아가신 장모도 당뇨를 30년 이상을 앓으며 고생하셨던 것을 봤다. 내 병이 걱정도 되었지만 한편 그분같이 관리만 잘하면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생전에 장모는 밥숟가락을 놓기가 무섭게 걸었다. 그때는 이유를 잘 몰랐고, 그저 ‘운동을 열심히 하시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장모는 운동과 식이요법으로 30년 이상을 당뇨병을 다스려가며 살다가 타계하셨다.


나는 혼란스러운 시간이 지나고 당뇨병 환자가 된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약을 먹었다. 그 당시 나는 전남 광양에서 본업인 선박에 관한 검사업무를 했다. 그러다가 지인의 꼬드김과 내 욕심 때문에 전북 부안에 사업체를 만들었다. 검사업무는 직원에게 맡겨놓고 이틀에 한 번씩 부안을 오르내렸다. 생선을 가공하는 공장인데, 사실 나는 전혀 모르는 분야였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업이 잘될 일 있겠는가?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사업을 했다는 것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런 내가 사업체의 대표가 된 것이었다. 내가 가진 돈은 한계가 있었다. 눈만 뜨면 직원들이 업무에 필요한 돈을 요구했다. 아침이 오는 것이 두려웠다. 그냥 이대로 자다가 죽었으면 하는 생각을 자주 했었다. 그런 상황에서 몸이 아프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었다. 예전부터 나는 한 가지 일만 하는 것에 만족하지 못했다. 현실에도 충실하지 못하면서 미래만을 위해 사는 멍청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살다가 결국 사고가 제대로 터진 것이었다.


그때까지는 타고난 몸으로 스스로 건강하다고 생각하며 잘 버티고 살았다. 그러다가 몸에 이상이 생겼다. 전화만 와도 ‘어이쿠 빚쟁인가?’, ‘노크만 해도 직원이 또 돈 달라고 하나?’ 가슴이 뛰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수입은 없이 계속되는 지출에 술 없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직원 월급날은 왜 이리 빨리 돌아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당시 매일 집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집밥을 제때 먹지 못하다 보니 영양분을 제대로 섭취할 수 없었다. 자주 밥 대신 라면으로 끼니를 때웠다. 운동을 충분히 할만한 여유도 없었다. 온갖 걱정으로 잠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이 모든 것이 병을 부르는 나의 모습이었다.


이렇게 해서 생긴 당뇨병을 단지 병원에서 처방한 약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막연히 약만 먹으면 병이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식사는 거의 외식을 하게 되니 잡곡밥으로 바꾸고 싶어도 바꿀 수가 없었다. 여주라는 식물을 말려서 차로 마시면 당뇨병에 좋다고 해서 마셔도 봤다. 여주는 무척 쓰기만 했고 당뇨에 도움이 되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밀가루 음식과 설탕이 들어간 달콤한 음식을 계속 먹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쌀밥을 현미밥으로, 탄산음료수 대신 물로 바꾸고 설탕과 밀가루 음식은 완전히 싹을 잘랐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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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뒤늦게 알아보니 당뇨병은 인슐린 문제로 혈액에 당 수치가 높아서 생기는 병이고 그로 인한 후유증이 엄청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뇨병으로 인해 미세혈관에 동맥경화가 생기게 된다. 혹시 발에 상처가 나면 치료가 안 되고, 괴사 되면 그 발을 잘라야 한다. 신장의 혈관에 이상이 생겨 몸에 노폐물을 걸러내지 못하면 결국 죽게 된다. 당뇨병 환자들이 신장 투석을 받는 이유였다. 눈에 황반변성이 와서 실명할 수도 있다. 치료되지 못하는 당뇨병의 끝은 발을 자르거나 실명하거나 죽어야 하는 무서운 병이었다. 이런 말을 듣고 나는 경악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이야기들뿐이니 의사 말에 따라 정성스럽게 약을 챙겨 먹을 수밖에 없었다. 혹시 출장이나 여행을 가기 전 제일 먼저 챙기는 것이 당뇨약이었다. 마음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내 몸을 공격해서 당뇨병 환자가 된 것이었다. 그때는 몸과 마음이 하나였는지를 몰랐다.


나는 다행히 끔찍한 생활을 1년쯤 지나고 나서 사업체를 다른 사람에게 넘길 수 있었다. 지옥에서 탈출을 한 것이었다. 그즈음에도 여전히 한 달에 한 번 병원에 가면 거의 같은 수치의 혈당이 확인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재미교포이자 기능 의학을 공부한 조한경 의사의 ((환자혁명))이라는 책을 만나게 되었다.

그동안 만난 의사들은 당뇨병이 걸리면 죽을 때까지 약을 먹어서 혈당을 관리하라고만 했다. 그런데 당뇨는 혈당수치를 병원에서 처방해 주는 약으로 관리만 하다가는 내가 걱정하는 결과로 갈 수밖에 없다는 내용이었다. 원인을 치료하는 방법이 생활습관을 바꾸고 운동을 하는 것이었다. 이제 나의 목표는 약을 끊는 것이 되었다. 조한경 의사는 당뇨는 설탕과 밀가루를 끊고 운동과 간헐적 단식으로 치료가 된다고 이야기를 했다. 당뇨병 진단을 받고 처음으로 의사가 치료된다는 말에 희망을 가졌다. 당시 간헐적 단식은 아내의 반대로 못하고 식이요법을 하기로 했다.


당뇨병에 걸린 지 2년여 만에 우선 운동하는 시간대를 바꿨다. 예전에는 식사하기 전에 했던 헬스클럽의 근육운동을 식후로 변경했다. 그동안 좋아했던 설탕과 밀가루가 들어간 음식을 끊기가 쉽지가 않았다. 두 가지를 끊는데 꽤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반 공기로 줄인 밥을 먹고 나면 무조건 걸었다. 걷기 운동은 병원에서 처방한 약을 먹듯이 걷고 또 걸었다. 나는 걸으면서 당뇨병이 나을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그렇게 식이요법과 운동을 하여 2년 후에는 담당 의사와 상의하여 당뇨약을 끊게 되었다.

이것이 나의 당뇨병 관리를 위한 첫 번째 시련과 도전이었다.

2024.05.12.

조한경/((환자혁명))/에디터/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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