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12화. 왕관 쓴 곰

 어느 날, 곰 한 마리가 숲을 돌아다녔다. 평소 게으른 탓에 곰에겐 음식이 늘 부족했다. 먹을거리를 찾아 헤매던 곰은 금세 지쳐 바닥에 누웠다.

 “제길, 왜 내 집엔 그 흔한 감나무조차 없는 거야! 달콤한 감이 내 입안으로 쏙 떨어지면 얼마나 좋아? 이렇게 누워 입만 벌리고 있기만 하면 되는데.”

 상상만으로도 신났던지 곰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그렇다고 상상만으로 배고픔이 달래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침샘을 더욱 자극해 짜증만 늘어났다. 귓속으로 찌찌찌 풀벌레 소리가 들려왔지만, 고개 돌리는 것마저 귀찮은 곰은 그대로 눈을 감아버렸다.


 툭!

 둔탁한 물건이 곰의 배에 떨어졌다. 깜짝 놀란 곰이 눈을 번쩍 떴다. 곰은 본능적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풀벌레마저 자취를 감춰 숲은 고요했다. 다만 독수리 한 마리만이 곰의 머리를 돌고 있었다.

 “아, 저 독수리였어? 겁도 없이 감히…….”

 독수리를 노려본 곰은 배에 떨어진 물건을 집었다. 그 물건은 반짝반짝 빛을 내는 왕관이었다. 순간 할아버지 얘기가 떠오른 곰은 왕관을 들고 집으로 급히 걸어갔다. 하늘에선 독수리가 계속 곰을 쫓아왔지만, 어느 순간 포기했는지 곰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집에 돌아온 곰은 왕관을 머리에 썼다. 할아버지 얘기에 따르면 오래전 큰 홍수에 휩쓸려 왕관이 사라졌는데, 그 왕관을 다시 찾는 동물이 숲을 다스리는 왕이 된다는 것이었다.

 “왕이라? 왕이면 뭐든 다 할 수 있는 거잖아? 원하는 것은 뭐든지…….”

 곰의 예상은 적중했다. 동물들은 왕관을 쓴 곰을 보자 모두 예를 갖추기 시작했다. 동물들은 자연스럽게 곰을 숲의 왕으로 받아들였다. 얼떨결에 왕이 된 곰은 상상 속에서나 그려왔던 생활을 현실로 맞이했다. 음식을 얻기 위해 애써 숲을 돌아다니지 않아도 동물들이 대신 대령해 주었다. 온갖 맛있는 과일과 달콤한 꿀이 끊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빈둥거리며 먹고 자기만 했으니 딱 곰이 원하는 생활이었다.

 “왕이란 건 정말 좋구나! 세상에 왕보다 편한 것이 또 있을까?”

 곰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만 갔다. 동물들도 큰 불평을 하지 않고 성심껏 곰을 왕으로 대우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두더지 가족이 곰 앞에 우르르 몰려갔다. 곰은 두더지 가족을 물끄러미 내려보았다. 내심 뭔가 맛있는 음식이라도 갖고 왔는지 눈알을 분주하게 돌렸지만, 두더지들에겐 아무것도 없었다. 급실망한 곰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너희들이 무슨 일이냐?”

 “임금님, 우리 가족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분은 임금님밖엔 없으세요.”

 두더지들의 얘기에 곰이 속으로 생각했다.

 ‘문제? 그거 귀찮은 문제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우리 가족은 배수로 공사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주 중요한 길목에 바위가 길을 막고 있어 더는 공사를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임금님이라면 해결해 주실 것 같아서 왔습니다.”

 곰은 왕의 체면이 있었던 터라 귀찮음을 꾹 누르고 두더지 가족과 함께 바위가 있는 곳으로 갔다.

 바위는 곰의 예상보다 훨씬 더 컸다. 곰은 힘을 주어 바위를 움직여 보았다. 바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곰은 더욱 힘을 주어 바위를 흔들었다.

 “으라! 으랏차!”

 곰의 입에서 기합 소리가 나왔다. 곰은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던 힘을 쏟아부었다. 그렇지만 바위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몇 번의 시도 후에 곰은 포기할 목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이 바위는 그냥 놔두는 것이 좋겠다! 나중에 바람이 세게 불면 뽑힐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그때까지 기다려보자.”

 곰의 얘기에 두더지들은 실망한 채로 집에 돌아갔다. 며칠 뒤 이번에는 수달들이 곰에게 몰려왔다.

 “임금님, 큰일 났어요.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강물이 말라버렸어요. 임금님께서 해결해 주실 거죠?”

 억지로 몸을 움직여 강에 도착한 곰은 바닥이 드러날 정도로 수심이 줄어든 강을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때마침 두더지 일이 떠오른 곰이 말했다.

 “그냥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 비는 언젠가 또 올 거야. 그때까지 모두 집에서 기다려보아라!”

 곰의 조치에 실망한 수달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이후 며칠이 흘렀다. 그날은 따뜻한 햇볕이 알맞게 내리쬐어 낮잠 자기에 딱 좋은 날이었다.

 “임금님, 들에서 갑자기 나타난 늑대가 우리를 공격했습니다. 임금님께서 맞서 싸워주실 거죠?”

 상처를 입은 양들이 곰 앞에서 말하고 있었다. 어떤 양은 다리를 물렸는지 쩔뚝거리고 있었다. 양들의 모습을 본 곰은 내심 털컥 겁이 났다. 괜히 늑대와 마주쳤다 곤란한 일을 겪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곰은 두더지와 수달의 일을 연달아 떠올렸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그냥 놔두자! 너희가 들에 나가지 않는다면 늑대도 나타나지 않을 거야. 그러니 다시는 들에 나가지 말아라!”

 곰의 대답에 양들도 크게 낙담했다.     


 이후 동물들 사이에 왕에 대한 불만이 커졌다. 처음 두더지 가족의 사연을 들었을 때 동물들은 이해했다. 아무리 왕이더라도 바위를 움직일 정도로 힘이 세지는 않으니까. 수달의 부탁이 거절당했을 때도 동물들은 넘어갔다. 비를 내리게 하는 것은 하늘의 일이니까. 하지만 양들의 소식에 동물들은 더는 참지 않았다.

 “왕이라면 당연히 우리가 힘들 때 도와줘야 하는 거 아냐?”

 "어떻게 왕이 늑대 하나 대적할 용기도 없다는 거지?"

 “가만히 누워 음식만 넙죽 받아먹으면서 우리를 도와주는 일은 눈곱만큼도 없지! 흥!”

 “우리 왕은 전혀 지혜롭지도 않고 또 용감하지도 않군!”

 화가 난 동물들은 일제히 곰에게 달려갔다. 당장 왕에서 물러나라고 외쳤다. 곰은 성난 동물들을 보고 덜컥 겁이 나 황급히 뒷문으로 도망쳤다. 왕관을 꼭 안고서 말이다. 곰은 왕관만 있으면 언제든지 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전 11화 11화. 그 사슴과 그 돼지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