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와 이직 사이, 그 안에서 더 단단해진 나를 만났다
세상에서 가장 요란했던 퇴사와 이직이 끝났다. 뭐가 그리 어려웠을까?
나를 지독히 괴롭히던 건 '기회비용'이었다. 스테이하면 가질 수 있는 안정감, 소속감, 인정, 프로젝트 등의 메리트를 버리는 만큼 얻을 것이 확실해야 했다. 그래서 연봉에 집착하고, 스스로를 계속 의심했다. 새로운 곳에 가서도 잘 해낼 수 있을지, 또다시 인정을 받을 수 있을지, 나간 걸 후회하진 않을지 스스로를 믿지 못했다.
그런데 결국 겪어보지 않으면 아무도 모른다. 아무리 첫인상이 좋은 사람이어도 사계절은 겪어봐야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헤어질 때가 돼서야 본모습을 드러내는 사람도 있다. 회사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밖에서 잘 포장된 곳이라 해도 나와 맞지 않을 수도 있고, 취업 사이트 평점이 개떡이라도 나와는 찰떡일 수도 있다. 직접 부딪혀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였는데, 어쭙잖은 N의 상상력을 발휘해 머릿속에서 너무 많이 재고 고민했다. 퇴사와 이직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된 것들을 남겨보려 한다.
퇴사율이 낮은 부서에서 일하고 있어서 모두 만족하며 지내는 줄 알았다. 그래서 더 퇴사를 말하기 어려웠다. 말을 꺼내는 순간 '배신자' 낙인이 찍힐 것 같았다. 하지만 생각보다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비슷한 연차인 분들은 나와 마찬가지로 '머물러 있는 느낌'이 고민이라고 하셨고, 더 연차가 높은 분들은 지금이 적기인 것 같다는 응원을 해주셨다. 새로운 곳에 와서도 똑같이 느꼈다. 아예 부서가 새로 생겼기 때문에 대부분 경력직으로 다른 회사에서 넘어왔다. 이전 직장에서 비슷한 권태를 느꼈고, 새로운 도전을 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다. 역시 직장은 직장인지라 모두 닮은 고민을 안고 있었다.
이번에 퇴사를 하며 일이야 어디 가서든 잘할 테니 걱정은 안 된다는 말을 들었다.
'저는 제가 너무 걱정되는데 말이죠... 걱정해주시면 안 되나요...?'
라는 어린 말을 할 뻔했다. 그리고 계속 곱씹었다. 일머리가 있는 편이라 늘 칭찬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왜 칭찬을 받는지 모르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딱히 스킬이 있는 것도 아니고, 회사 매출 단위를 바꿀 만큼 엄청난 성과를 낸 것도 아니고, 화술이 좋아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태도였다. 하나를 해도 할 수 있는 A부터 Z까지를 도맡아 하려 했고, 함께 일하는 사람이 있다면 서로 배려해서 좋은 감정으로 결과를 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결국 '신뢰'의 문제였던 것 같다. 내가 인정받았던 건 능력이 뛰어나서라기 보단 나보다 나를 더 믿어주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료 잘 만나는 것도 정말 하늘의 별따기인데 저의 직장 생활에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상 어디 가서든 사랑받고 인정받으실 분이라는 걸 너무 잘 알아서 전혀 걱정이 안 되네요. 그분들은 복 받으신 거예요.'
퇴사 날 한 분이 준 편지에 적혀있던 문구였다. 여기서도 느껴지듯 퇴사하기 아쉬웠던 이유 중 하나는 인간관계였다. 빌런은 어디에나 있다는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이 있건만 이상한 사람이 없었다. 그만큼 좋은 조직에서 일했기 때문에 다시는 같은 환경에서 일하지 못할까 봐, 좋은 사람들을 잃게 될까 봐 힘들었다. 하지만 진짜 관계는 퇴사 후 시작되었다. 여전히 몇 분과는 메신저로 연락을 주고받고, 따로 약속을 잡고 만나기도 했다. 각자 다른 회사에 다니다 보니 더 솔직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부분도 있었다. 관계의 재편 속에서 더 인연이 단단해졌음을 느꼈다.
처음 이직한 날은 거의 울 뻔했다. 비품 하나도 어디 있는지 모르겠고, 법무나 회계 시스템은 물론 출퇴근 도장 찍는 법 마저 낯설었다. 이전 팀장님께서 새로운 곳에 가면 전학 간 기분일 거라고 하셨는데 딱 그랬다. 혼란 속에서 가장 많이 느꼈던 건, '평온함'은 그냥 얻어지는 게 아니란 사실이었다. 전 직장에서는 하루하루가 너무 평화로웠다. 업무도, 인간관계도, 개인적인 일도. 하지만 그런 안정감이 과연 처음부터 있었던 걸까? 전혀 그렇지 않다. 그간 느낀 모든 평온은 결국 내 노력의 결과이자 부산물이었다는 걸, 다시 찾아온 혼란을 느끼며 깨달았다. 여기서도 언젠가 평온함이란 감정을 만나게 되길 바란다. 또 끝이 온다는 신호겠지만 동시에 안정감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증표가 되어주기도 할 테다.
상사와 면담 중 경력직 수습기간을 평가하는 설문지의 모든 항목에 '매우 좋음'을 체크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 순간 느껴버렸다. 내 안의 인정 욕구가 다시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미 최고의 평가를 받은 상태에서 무얼 더 보여줘야 하나 싶었다. 이전 회사에서 나를 괴롭히던 것 중 하나가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이었다. 항상 연차 대비 일을 잘한다는 평을 받았다. 처음엔 좋았다. 하지만 갈수록 버거워졌다. 분명 내가 즐거워서 더 잘하고 싶어서 한 일인데, 어느 순간부터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일하고 있었다. 여기서도 인정 욕구의 굴레가 또 시작될 것만 같았다. 그래서 회사가 아닌 나를 중심으로 일해야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했다. 타인의 기대를 실망시킬 용기도 필요하다. 결국 환경이 바뀌어도 내가 바뀌지 않는다면 문제는 반복될 것이다.
이직 후 지금 하고 있는 일 외에도 다른 업무도 맡아보면 좋겠다는 말을 들었다. 사실 여기 오기 전부터 하고 싶었던 일이었다. 이곳에 온 이유이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진짜 담당자가 된다고 하니 부담되고 두려웠다. '정말 내가 해도 되는 일일까? 더 적임자가 있지 않을까?' 자신이 없어졌다. 한편으로는 기가 찼다. 이런 거 하고 싶다고 편하게 다니던 직장 내려놓고 와서는 왜 그러는지 어이가 없었다. 스스로와의 대화를 이어가다가 이럴 바엔 일단 시작이나 해보자 싶었다. 이전에는 어렵게 느껴졌던 게 당연하게 되는 순간 늘 짜릿함을 느낀다. 다시 한번 그 짜릿함을 느껴보고 싶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를 기억해야지.
새로운 회사에서의 생활도 벌써 100일을 맞이했다. 만족하느냐고? 솔직히 정말 잘했다고 생각한다. 이직 후 하루하루를 소중히 보내고 있다. 처음엔 인수인 계표를 까보고 뭐 이렇게 일하는 데가 있나 싶었다. 멘붕 그 자체였다. 이렇게 일하는 게 가능한가 싶었는데, 그런 문제 하나하나가 다 기회였다.
노션 페이지를 하나 만들어 여기서 하고 싶은 일과 늘 힘이 될 수 있는 말들을 적어 두었다.
이전 회사에서는 안 하던 일간, 주간, 월간 업무 회고도 하고 있다. 물론 아직 해나가야 할 일이 산더미이고, 이 회사에서의 끝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퇴사와 이직이란 한 사이클을 경험해본 것만으로도 이미 얻은 게 많다. 백날천날 브런치, 블라인드, 리멤버에서 직장 관련 글을 봐도 스스로 겪어보지 않으면 알지 못하는 것들을 비로소 알 수 있게 됐으니까. 퇴사하지 않았으면 몰랐을 것들이다.
이미 나이로는 어른이 된 지 한참인데, 또 다른 종류의 진짜 어른이 된 느낌이다. 퇴사와 이직 사이, 그 안에서 더 단단해진 나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