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내 처음이라 다행이야
2022년 5월, 그렇게 나는 정들었던 첫 회사를 떠났다. 최근 3~4년 동안 가장 많은 눈물을 쏟아낸 시기였다. 생전 느껴보지 못한 수많은 감정들이 오갔기도 했다. 퇴사 확정이 나고 조금은 길었던 인수인계 시간을 가지며 사람들과 천천히 이별 준비를 했다. 한 분 한 분 따로 식사를 하며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 느꼈던 건 '여기가 내 처음이라 다행이다'였다. 좋은 환경에서 좋은 분들과 따로 또 같이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퇴사를 말 하기까지가 가장 힘들었고, 그 이후에는 함께 일했던 동료들과 마지막 순간을 보내는 데에 더 집중했다.
사실 마지막 일주일을 남겨 놓고도 퇴사를 한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러다 이틀 전부터 온 감각이 퇴사를 향해 곤두세워졌다. 모든 업무가 '정리'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큰 틀의 인수인계는 다 끝난 상황이었지만, 마지막까지 혹여나 놓친 게 있을까 봐 노심초사했다. 그리고 퇴사 날, 아침부터 계속 눈물이 나와 사무실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지를 못 했다. 사방이 꽉 막힌 회의실을 찾아 예약해 거의 반 종일을 거기서 보냈다. 그간 함께 일했던 파트너사 분들과 마지막 통화를 하는데, 한 통화를 마칠 때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렇게 마지막 근무 날임에도 거의 자리에 없었고, 업무 마무리를 다 한 뒤 컴퓨터 리셋을 하는데 또 눈물이 났다. 그러고 나선 자리로 돌아와 조용히 짐 정리를 했다. 사부작 거리는 소리에도 아무도 내색하지 않았다. 모든 떠날 준비가 끝났는데, 하필 바로 뒷자리에 계셨던 팀장님의 통화가 끝나질 않아 짐을 끌어안고 한참을 자리에 앉아 있었다. 20분가량이 지나자 드디어 팀장님의 통화가 마무리되었다.
뒤를 돌아 작별 인사를 하며 미리 준비한 퇴사 선물을 주섬 주섬 꺼냈다. 한 분씩 선물을 드렸고 본부장님의 자리에 갔을 땐 이미 마스크가 눈물로 흥건해진 후였다. 진심으로 눈물샘을 잠시 없애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뒤로는 어떻게 회사를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여기저기서 급하게 쥐어주신 선물들과 짐을 잔뜩 양손에 쥐고서는 도망치듯 회사 밖으로 나왔다. '퇴사하기 딱 좋은 날이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날씨도 정말 좋았다.
도저히 버스를 타고 집에 갈 꼴이 아니라는 계산이 나와 택시를 불렀다. 차에 타고 나서야 모든 긴장이 풀렸다. 하지만 그 뒤로도 눈물 파티는 끝나질 않았다. 택시 안에서 단톡방을 나오려고 마지막 메시지를 쓰는데 또 한 번 눈물, 집에 와서 팀원 분들이 써준 편지를 읽는 데 또 한 번 눈물, 아쉬운 마음에 팀원 분들과 톡으로 남은 이야기를 나누다 또 한 번 눈물을 쏟았다. 다음 날엔 눈이 너무 부어 그냥 포기했다. 옆 부서에 있던 분들이 봤다면 어디 쫓겨나는 줄 알았을 거다.
지나와서 생각해보면 남들 다 몇 번씩은 겪는 퇴사인데 뭐가 그리 유난이었을까 싶다. 하지만 그만큼 애정을 다해 다녔던 곳이었다. 퇴사 후에는 한 여름밤의 꿈을 꾼 것 같았다. 3년 반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을 다녔는데 다 옛날 일처럼 느껴졌다. 대학교를 졸업할 때도 비슷한 감정이었다. 모든 시간을 밀도 있게 살았는데, 지나고 나면 아득해진다. 때로는 남일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참 좋은 꿈을 꾸었구나 싶었다.
수고했어 사랑 고생했지 나의 사랑
우리의 이별을 고민했던 밤
서로를 위한 이별이라고
사랑했단 너의 말을 믿을게
아이유 '첫 이별 그날 밤'
<내가 첫 회사와 했던 건 연애였나 보다>에서 밝혔듯이 내가 연모했던 회사에 기적적으로 들어가 짝사랑이 쌍방으로 바뀌었지만 결국 끝은 있었다. 아이유의 '첫 이별 그날 밤'이 생각나는 밤이었다.
이렇게 퇴사와 이직 사이에서 기나긴 두 달의 여정이 지나갔다. 사실 퇴사를 하며 눈물 파티를 했지만, 눈물을 흘리는 와중에 다시 한번 극명히 깨달아 버렸다.
아, 나는 퇴사를 했어야만 했구나..
그날의 눈물엔 아쉬움과 미련이 전혀 담겨 있지 않았다. 대신 지난날의 열정과 애정이 떠올랐다. 한참 순수한 열정으로 애정을 쏟으며 일했던 그때의 내가 떠올랐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 동시에 동료들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도 있었다. 이직 제안을 받은 후 경력 기술서를 쓰면서야 퇴사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서류, 면접, 처우 협상을 거쳐 퇴사 면담을 하면서야 '여기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다 했다'라는 결론에 닿았다.
이직하는 회사에서 어떤 일이 펼쳐질지는 아무것도 모른다. 어쩌면 더 잘 맞을 수도 있고, 어쩌면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상사가 정말 별로라던가, 수습기간에서 잘린다던가, 그룹이 통으로 날아가 버린다던가. 그런데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모든 건 겪어봐야 안다. 혹여나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다고 해도 내 인생 자체가 최악이 되진 않는다. 그럼 또 다른 선택의 길이 열릴 것이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극도의 두려움이 있었는데, 퇴사와 이직을 겪으며 불안 또한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됐다. 이미 나이로는 어른이 된 지 한참인데, 또 다른 종류의 어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