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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정애 Aug 26. 2024

한 여름 밤의 꿈

죽은 나무와 산 나무 15

이게 뭐지? 수박 아니야? 어머 수박 맞나 봐. 요런 깜찍한 일이 있나. 다 죽어가는 꽃기린이 기사회생하고 있는 중인 그 화분에 뭔가 올라와 같이 자라고 있다.  수박 같은데?  하필이면 수박씨가 여기 떨어졌나?  하루하루 지켜보는데 수박이 맞다. 마티스의 색종이 같은 잎모양이며 가늘디 가는 덩굴손이 나비 입처럼 돌돌 말려 나오는 것도, 수박이 맞다. 

 

학교 화단에도 수박이 자라고 있었다. 노란 수박 꽃이 폈을 때만 해도 이거 수박이 열리겠나? 의심했지만 줄무늬를 그은 오리알 만한 수박이 열렸다. 커다란 수박만 보던 아이들은 미치려 했다. 너무 앙증 맞고 귀여워서. 나도 죽을 거 같았다. 매일 아침 수박을 보러 일부러 화단을 거쳐 교실로 돌아서 왔다.


며칠 뒤엔 거위알 만해져 있다. 나중에 나온 동생도 얼굴이 동그랗다. 줄무늬가 똑 같다. 타조알 만해 졌을 때 누군가 마른풀을 깔아 주었다. 수박이 편하게 자리를 잡았다.  작고 귀여운 수박을 따서 깨먹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름방학을 해서 그 꼴을 안 본 게 다행이었다. 

                                                             

화분의 수박은 약하디 약했다. 그런데도 포기 않고 기운 없고 외로운 꽃기린의 몸을 타고 올라가 귀여운 손으로 껴안고 감싸며 위로하고 용기를 줬다. 수박은 작고 가녀리고 연약해서 걱정스럽게 예뻤고 어깨를 내준 꽃기린은 더 힘이 나는 듯 씩씩해 보였다. 


잘 어울리는 서로였다. 연 초록의 수박 잎과 진한 초록의 꽃기린 잎, 복잡한 수박의 라인과 심플한 꽃 기린의 면이 만드는 멋진 콜라보였다. 거기다 정점을 찍는 붉은 꽃은 누구의 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다.   


수박은 좁은 화분에 태어난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도, 약한 몸에 꽃을 피울 수 없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는듯,  머물다 갈 곳을 내 준 꽃기린에게 마지막 기운까지 다 써서 최고의 시간을 선물해 줬다. 그런 뒤 서둘러 시한부의 생을 마감했다. 한 여름밤의 꿈 같은 시간이었지만 누가 수박의  삶이 짧았다고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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