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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sun Leymet Mar 16. 2021

생일파티

내성적인 아이는 생일파티를 한다. (Photo by M. Leymet)

    "생일 파티할래, 파티를 하지 않는 대신 선물을 많이 사줄까?"


라는 질문에 나는 선물을 많이 받겠다고 했다. 뭔가 잡다하게 많이 받았다. 어린 눈에도 고급져 보이던, 나무로 깎은 예쁜 도토리 모양이 달린 머리끈이 생각난다. 유난히 예뻤던 연필과 표지가 반짝거려서 쓰기 아까운 공책도 여럿 있었다. 개학 준비물로 사던 것들보다는 분명 더 예뻤다. 나보다 더 환하게 미소 짓고 있는 엄마의 흐뭇한 얼굴을 보며 나도 웃어주었지만, 속으론 생일파티를 할 걸 싶었다.






    "생일파티는 어떻게 해주는 거예요?"


    물어물어 생일파티의 공식을 알아내기까지 몇 해의 경험을 거쳐야 했다. 공식이란 말이 어울리지는 않지만, 이곳에서 이방인인 나는 억지로라도 공식을 만들어내야만 무엇에든 무난하게 묻어갈 수 있다고 믿었었다. 두가 만 두 돌이 되는 날 크레쉬*에서 생일파티 때 먹을 간식을 가져오라고 했다. 무얼 가져가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너무 유난스럽고 싶지 않았고, 그렇다고 너무 초라하고 싶지도 않았다. 슈퍼에서 파는 주스 두 병과 마들렌 류의 개별 포장된 빵을 인원수보다 조금 더 넉넉하게 사서 들여 보냈다. 내 성에는 차지 않았지만, 보통 그리들 한다더라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생일 파티 사진이라고 크레쉬에서 특별히 찍어준 사진 한 장을 받았다. 생일상이 정말이지 너무나 초라했다.



두의 두 돌 생일 케이크. (Photo by Misun Leymet)



    세 돌 생일 때에는 크레쉬에 근사한 생일 케이크를 사서 보내고 싶었다. 그것도 왠지 유난인가 싶었다. 케이크를 만들어 본 적도 없으면서 직접 만들어 보기로 했다. 돈을 쓰면 유난처럼 보이지만, 정성을 쏟는 것은 감동이 되기도 하니까. 모양이 너무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맛있는 케이크가 뭐가 있을지 한참을 고민했다. 한국에서 제과점에 가면, 동그란 생일 케이크보다 기다란 롤케이크가 조금 더 수수하게 보이던 것이 생각이 나서 시도해 봤다. 김밥은 잘 말아지던데, 롤케이크는 당최 내 맘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가장 무난한 동그란 초코맛 빵을 만들어서 꽃장식을 수수하게 했다. 어쩌면, 프랑스에서는, 흔치 않은 롤케이크보다 흔한 동그란 케이크가 더 수수한지도 모르겠다.



직접 만든 세돌 생일 케이크. (Photo by Misun Leymet)


예쁘고 맛있는 롤케이크를 만들어 주려고 세 번이나 연습을 했다. 매번 다른 모양, 다른 맛이 나와서 포기했다. (Photo by Misun Leymet)



    남편이 비행기 만들기 키트를 사서 생일 파티 날에 두의 반 아이들에게 나눠주자고 했다. 하나에 1유로짜리 종이비행기였다. 선물까지 나눠주는 건 유난이지 싶었지만, 허술한 비행기를 보고 유난이라고 할 것 같진 않았다. 비행기 열댓 개를 사면서 아이들에게 나눠줄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더도 덜도 아니고 딱이지 싶었다. 크레쉬에 아이를 데리러 갔더니, 선생님께서 케이크가 맛있었다고 했고, 아이들이 즐겁게 꽃장식을 하나씩 나눠 가졌다고 했다. 그리고 비행기 선물을 챙겨 온 걸 너무나 고마워하셨다.






    두의 네 돌 생일이 왔다. 이제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네 돌 아이들은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한다고 하길래 우리도 그러기로 했다. 카드를 써서 아침 등굣길에 담임 선생님께 드리면 선생님이 알아서 아이들 가방에 넣어두거나 부모님께 따로 드린다. 혹시 초대받지 못해서 슬퍼할지도 모르는 아이들을 위한 작은 배려이다.


    생일날 아이를 데리고 온 부모들의 얼굴은 낯이 익다. 그중 몇몇의 부모와는 친분이 있지만, 대화 조차 나눠보지 않은 경우도 있다. 카드에 쓰여있는 날짜와 주소, 전화번호를 보고 우리 집에 아이를 데리고 온 그들과 처음으로 서로를 소개했다. 아이들도 너무 어리고, 부모들끼리 서로 아는 사이도 아니기 때문에, 아이들과 함께 있다가 가는 줄 알았다. 이제 막 세돌이 지난 아이를 낯선 집에 홀로 두고 나온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들만 달랑 문 안으로 넣어 놓고 다들 쿨한 척 되돌아 갔다.


    프랑스 아이들의 생일파티는 대부분 오후 4시를 끼고 간식 시간에 이루어진다. 두시든 세시든 생일 파티가 시작되면, 실컷 놀던 아이들이 오후 4시쯤에 둘러 모여서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케이크를 잘라서 나눠 먹는다.


    아직 낮잠을 자는 3돌 아이들의 일과를 배려해서 오후 네시쯤에 아이들을 초대했다. 토요일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일이라서 몇 명을 초대할지도 고민거리였다. 왠지 네 돌 생일엔 네 명이 맞는 것 같았다. 감당할 수 있을만한 숫자였다. 빵집에서 근사한 초콜릿 케이크를 샀다. 블루베리, 딸기, 포도, 산딸기 같이 누구나 좋아하는 과일도 쌓아 놓았다. 짜 먹는 요거트와 주스 그리고 달달한 팝콘도 준비했다. 나름, 건강과 아이들의 입맛까지 고려한 상차림이었다. 아이들은 물만 찾았고, 거의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이 날 또 한 가지 깨달았다. 아이들이 노느라 정신이 팔려서 뭘 먹지도 않을뿐더러, 제과점 빵보다는 슈퍼 빵을 더 좋아한다는 것을.



두의 네 돌 생일파티 상차림. (Photo by Misun Leymet)






    생일날엔 생일인 아이도 선물을 받지만, 초대를 받아서 온 아이들도 선물을 받는다. 두의 세돌 생일 때 나눠줬던 비행기도 그런 의미에서 마련했던 거라는 것을 나는 일 년이 지나고 알았다. 남편의 기발한 아이디어인 줄만 알고 있었다. 초대에 응해주고, 집에 와 주었던 친구들에게 대한 고마움의 표시라고 한다. 마트에서 생일파티 용품 코너에 가면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이미지가 그려진 작은 봉지 묶음을 볼 수 있었다. 그 봉지가 바로 선물을 담는 봉지였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파티에 다녀오면서 아이 손에 들려 나온 봉지 안에는 주로 사탕이나 젤리, 초콜릿 등 군것질이 들어있다. 게다가, 풍선, 야광팔찌, 부실한 플라스틱 팽이, 주사위, 스티커 등등 작은 봉지에 들어갈 아주 작은 값싼 소품도 잡다하게 들어있다. 생일 파티에 다녀오면 그 봉지에 무엇이 들었는지 풀어보는 것이 또 한 번 재미있다.



덩이의 네 돌 생일파티에 온 아이들에게 나눠 주려고 미리 준비해 놓은 선물 봉지. (Photo by Misun Leymet)






덩이의 네 돌 생일 상. (Photo by Misun Leymet)



    지금은 친한 친구가 된 비르지니는 덩이의 네 돌, 즉, 친구들과 하는 첫 생일 파티에 자기 아들을 데려다 놓고는 주섬주섬 신발을 벗고 들어왔다. 첫 아이를 남에 집에 처음으로 떨어뜨려 놓는 날이었다. 아이들이 어려서 돌보기 어려울 거라며 굳이 도와주겠다는 비르지니를 등 떠밀어 내보냈다. 쿨한 척 돌아간 다른 엄마들도 비르지니와 같은 마음이었으리라. 비르지니는 출산 이후 처음으로 남편과 단둘이 데이트를 하고 왔단다. 멀리 가지도 못하고 근처 카페에서 고작 맥주 한잔씩을 비우고 온 것이 전부였지만 아이를 찾으러 온 비르지니는 눈이 반짝거렸고 얼굴에선 빛이 났다.


    나도 이미 첫 아이를 통해서 몇 번의 생일 파티를 해 본 경력자라고 생일파티에 대한 부담이 크지 않았다. 네 돌에는 네 명이 어울린다며 4명만 초대하게 했던 두의 첫 생일 파티 때와는 달랐다. 덩이의 생일 파티는 더 많은 친구들로 북적거렸다. 생일상도 단출해졌다. 아이들이 꼭 먹게 생긴 것만 놓았고, 사탕이나 군것질은 선물 봉지에 따로 챙겨줬다.






    2020년 봄, 프랑스 전 국민의 자가 격리 조치가 취해졌다. 밖에 나갈 때는 신분증과 함께 싸인을 한 외출증을 출력해야지 나갈 수 있었다. 외출 시간은 1시간으로 제한되어 있었고, 허가증이 있어야만 동네 밖을 나갈 수 있었다. 더더욱이 외국으로 나갈 하늘 길은 모두 묶여 있었다. 모두가 쥐 죽은 듯이 각자의 집에서 숨어 지냈다. 덩달아 아이들은 생일파티를 할 수가 없었다. 언제 자가 격리 조치가 철회될지 아무도 예상할 수조차 없었다.


    3월 17일에 시작한 대국민 자가 격리는 몇 번의 연장을 거쳐서 5월 11일까지 지속되었다. 오랜 시간 집에 갇혀 있던 아이들은 친구가 그리웠다. 의료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의료진들의 아이들만은 학교에 다닐 수 있게 조치가 풀렸다. 차차, 희망하는 아이들도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지만, 학교로 돌아가는 아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7월, 여름방학을 앞두고 전국의 아이들이 드디어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비록 2주간뿐이었지만, 부모들은 수많은 번복과 고민 끝에 아이들을 등굣길에 올렸고, 다수의 아이들이 등교를 했다. 2주가 지나면 두 달간 지속되는 여름방학을 맞이하게 된다. 부모들은 오랫동안 친구를 만나지 못한 아이들에게 이 오아시스 같은 2주를 선물해 주고 싶었다. 하루에도 수백 명씩 사망자가 나오게 하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두려웠지만 우리는 모두 이미 너무 지쳐 있었다.


    학교로 돌아 간 2주는 그야말로 축제의 시간 같았다. 오랜만에 만난 아이들은 얼싸안고 뛰어다녔다. 아이들에게 코비드니 어쩌니 해가며 떨어지라고 차마 말할 수 없었다. 2주가 지나면 다시 또 헤어져야 하는 이 아이들이 안타깝기만 했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죄인이었다. 마치 우리가 아이들의 세상을 빼앗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장을 보기 위해 밖을 나가면, 지구에 마치 나만 살아남은 것 같이 아무도 없었다. 격리가 풀리면서, 많은 사람들과 한 공간에 있는다는 것이 이렇게 들뜨는 일인 줄 몰랐다. 격리 기간 동안 마트에서 식료품을 사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서로를 의심했다. 적어도 이 2주만큼은, 모두가 주저 없이 서로 눈웃음을 주고받았다.


    7월, 곧 덩이의 생일이 오고 있었다. 두의 생일은 4월, 이미 한참 지났다. 고민 끝에 둘의 합동 생일 파티를 하기로 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조심스럽게 생일파티 카드를 내밀었고, 부모들은 카드를 덥석 잡아 쥐었다. 마치 이 세상에 남은 마지막 생일 초대장인 것처럼 그들 손에 소중히 들려 갔다. 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번 생일 파티는 정원에서만 했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아이들을 실내로 들이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밖에 상을 차렸고, 쉬고 싶은 아이들을 위해서 오픈형 텐트를 쳤다. 갖가지 게임을 하며 신나게 뛰어노는 아이들 얼굴에 하나같이 발간 행복이 피어올랐다. 아이들이 너무나 행복해 보였다.






    두가 처음 유아학교에 들어갔을 때, 다소 내성적인 아이를 위해서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 고민을 하곤 했었다. 두가 가지고 있는 훌륭한 다른 면모들이 있었기에 문제 될 것은 없었지만, 나 자신이 내성적이기 때문에 내성적인 사람이 갖는 불편함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 두의 담임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생일파티를 꼭 해주고, 놀이터에 자주 데려가는 것만으로 아이의 내성적 성향이 향상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그때부터 시작된 두와 덩이의 생일 파티는 매 해 반복되고 있다.


    어른들은 생일 파티를 우습게 여기는 경우가 많다. 생일 파티를 하는 성인을 마치 자기애가 지나치게 강한 사람처럼 치부하기도 한다. 두와 덩이가 이다음에 성인이 되었을 때, 생일 파티를 두려워하거나 불편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생일날 축하를 받고, 축하해 주는 상대에게 고마움을 표하며, 다른 이들의 생일에도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것이, 일상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면 좋겠다. 두의 담임 선생님이 생일 파티가 아이의 내성적 성향을 향상시키는데 도움이 된다고 했던 것도 어쩌면 이런 점에서 인 것 같다. 생일 파티를 통해서, 자신을 비롯한 우리 모두가 한명도 빠짐없이 중요한 존재임을 확인하는 기회가 될 것 같다.







            


*크레쉬는 생후 2개월부터 만 세돌 전후까지 다닐 수 있는 어린이 보육 기관이다. 의무교육은 아니지만, 부모의 수입에 따라서 등록 비용이 차등하기 때문에, 비용 부담 없이 많은 부모들이 크레쉬를 이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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