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생활을 하는 우리는 랜덤으로 관계를 맺는다.
우리는 랜덤으로 만난 사람들이다. 외국에 나와서 사는 사람들끼리 농담반 진담반으로 하는 말이다. 한국을 떠나, 프랑스라는 나라를 택해서 이곳에 와서 만난 사람들이라는 공통분모가 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만약 한국에서 만난 사이였더라도 과연 친구가 되었을까? 우리는 친구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두 부류의, 물과 기름과 같이, 마구 흔들어야만 잠시나마 섞이는, 잘 섞이지 않는 사람들이다.
외국에 살다 보면 한국 사람이 그리운데 반해, 주변에 그리 많지는 않다. 더구나 오래 살수록 친구가 쌓이기보다, 단기, 또는 장기 체류를 마치고 한국으로 영영 돌아가 버리는 친구들만 쌓이게 된다. 그러다 보면 내가 선택한 관계가 아닌, 나에게 주어진 관계를 받아들여야만 한국인 친구를 만들 수 있게 된다. 헤어짐과 만남은 나의 의도와 상관없이 반복되고 고갈된다.
부자연스럽게 가까워지고 의도하지 않아도 거리가 생기는 그런 불완전한 관계 속에 놓인 우리에겐 친구를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그리 넓지 않다. 모국어로 대화를 하면서, 내가 척하면 상대가 척 알아듣고, 내가 쿵 하면 상대가 짝 소리를 낼 줄 아는 한국인 친구가 절실할 때가 있다.
어떤 형식으로 만나게 되었든 간에 우리가 한국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만남을 이어 나가고, 그 사이에서 예상치 못한 삐걱거림을 반복한다. 한국에서였다면, 우리는 마주칠 일도, 마주쳤다 하여도 타인 대 타인의 관계였을 뿐이다. 우리는 성격이 잘 맞지도 않고, 성향이나 관심사도 다르다. 대화 중 선택하는 단어나 표현 방식도 너무나 달라서 통역사가 필요할 정도이다. 하지만 필요와 필연에 의해서 친구라는 운명적 관계를 맺고 유지한다.
랜덤으로 만난 인간관계의 알 수 없는 버거움이 반복되고, 한국으로 다시 떠나가 끊어져 버리는 관계들을 무력하게 바라보면서 거리 두기를 배운다. 이제 아무와 친구가 되어 호호 하하 마냥 웃고 싶은 어린 나이도 아닌 중년의 우리다. 그렇게 관계에 기대지 않는 연습을 한다. 새로운 만남에 신중하고, 새롭게 만들어진 관계를 대번에 친구라고 이름 짓기 이전에 서로를 알아가는 더딘 시간을 갖는다. 차곡차곡 시간을 쌓고 관계가 무르익어가기를 기다릴 줄 알게 된다.
이제 예전처럼 한발 크게 디뎌 상대에게 덥석 다가가지 않는 법을 배웠다. 우리는 서로를 이제 친구라고 칭하지만, 우리 사이엔 보이지 않는 선이 있다. 예전에는 그 선을 두고 더 가까워지지 않음을 아쉬워했을 테지만, 지금의 우리는 그 선을 서로에 대한 예의와 존중이라고 여기고 그곳을 넘지 않기 위해 배려한다. 마구 흔들어도 섞이지 않는 관계에서, 느리게 서로에게 스며드는 관계가 되어간다. 그 시간은 어쩌면 매우 길지만 그동안 인내하는 힘도 키워 나갔고, 동시에, 외로움과 절친이 되기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관계에 갈증 하고, 외로움과 사투를 벌이는 오랜 시간을 버텨냈다. 상대도 나와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내가 그런 감내를 하고 있다는 것을 상대도 잘 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간격을 예의를 갖추어 존중한다.
많은 소리를 내지는 않지만, 이방인인 우리는 서로를 연민하고, 짠하게 여긴다. 서로가 각자의 삶에 집중하여 어쩌면 타인처럼 살아가지만, 서로의 사소한 일에도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질 정도로 친해졌다. 나를 그들에게 새기고 그들을 내 마음에 소중히 간직한다. 외로움이라는 나의 절친을 잊지 않고 잘 챙기다 보면 상대의 절친도 존중해 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