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통신과의 인연
“뚜뚜뚜뚜 띠띠띠”
386 컴퓨터에 모뎀을 꼽고 전화선을 연결하여 01410 번호를 누르는 순간, 경쾌한 모뎀 연결 소리가 들렸다.
내 방 전화선으로 연결된 새로운 세상과 만나는 순간이었다. 파란 화면에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치고 들어가면 수많은 사람들이 PC통신 속에 있었고 시공을 초월한 새로운 온라인 세상을 경험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하이텔을 시작으로 수능을 마친 후에는 나우누리에 흠뻑 빠져있었다. 매일 밤마다 PC통신 대화방에서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과 쓸데없는 잡담으로 채팅을 즐겼고, 학번 모임이나 학교 동아리에 가입하여 새로운 인연을 만들었다. PC통신 때문에 늦은 밤 우리 집 전화는 항상 통화 중이었고, 가끔씩 상상을 초월하는 전화비가 나오기도 했다. 대학 합격부터 새내기 시절 내내 PC통신이 내 삶의 거의 전부였다도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나우누리 활동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대학교 모임과 95학번 연합 동호회.
12월 말 대학교 합격 통지를 받자마자 대학교 동호회에 가입, 매일매일 채팅방에 들려서 선배들에게 인사를 드렸던 95학번 새내기였다. 동호회에 있던 89학번부터 94학번까지 다양한 선배들에게 막내로서 큰 사랑을 받았고 대망의 2월의 정기모임에서 선배들에게 처음으로 대면 인사를 했다. 그 자리에서 모든 선배들이 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는 사실. 귀여운 새내기로 상상을 했지만 복학생 포스가 나는 나를 보고 참석자 대부분이 놀랐다는 웃픈(?) 이야기다. 어찌 되었건 그 첫 만남이 인연이 되어서 그 선배들은 내가 가장 친한 선후배 관계가 되었고 아직까지도 그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그 모임 이후 나는 PC통신에 대한 열정으로 대학동호회의 시삽(Sysop. 동호회 운영자)을 맞아서 1년 정도 모임을 이끌었다.
대학교 모임과 더불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것은 다복솔이라는 95학번 연합 모임. 그곳에서 나는 많은 친구들을 만났다. 사는 곳도 다르고 학교도 다르고 전공도, 성격도 달랐지만 학번이 같다는 이유로 우리는 하나였다. 게시판에 일상을 기록하고 밤에는 채팅방에 삼삼오오 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연애 얘기부터 군대 이야기, 스포츠와 여행, 학교와 취업까지 수많은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매주 번개 모임이 있었고 한 달에 한 번 정기 모임도 있었다. 적게는 5명, 많게는 200명이 모이기도 했다. 종로와 신촌, 대학로와 신림동 등이 우리들의 활동 무대였다.
하지만 그렇게 영원할 것만 같았던 우리들의 PC통신 모임도 그 영광이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친구들이 하나둘씩 군대를 가면서 회원들과 모임 참석자가 줄어들었고 웹기반의 인터넷이 발전하면 새로운 대체 커미티들이 하나둘씩 생겨났다. 나 또한 입대를 하면서 PC통신과는 조금씩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제대를 하고 다시 접속을 했을 때는 과거의 우리만의 공간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뭔가 어색한 모임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다음과 네이버, 프리챌 등이 시장을 키워가면서 PC통신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가끔씩은 PC통신을 하던 그때가 그리워진다. 함께 파란색 채팅창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그때. 순수했던 그 시절 밤새 술 마시며 고민하던 그 친구들.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