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사춘기의 시작
대학 새내기 시절, 나의 벗은 당구와 술이었다. 공강 시간에는 어김없이 동기 녀석들과 학교 앞 당구장으로 향했고, 가끔씩은 당구장에서 밤을 새우며 게임을 즐기기도 했다. 게임을 마무리하지 못해서 수업을 빼먹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 당시 당구비를 모았으면 차 한 대 샀을 정도로 열정적으로 당구를 즐겼다. 술도 마찬가지였다. 대학에 들어가서 처음 배운 '술'이라는 친구. 내 생애 첫 잔은 달달한 레몬 소주였다. 달콤하면서 상쾌한 그 맛에 반해서 친구들과 함께 자주 학교 앞의 소주방으로 향했다. 같은 과 동기 녀석들은 물론이고, 일주일에 두세 번은 PC통신 동호회 멤버들과 함께 술자리를 즐겼다. 소주부터 막걸리, 맥주까지 지칠 줄 모르게 '건배'를 외치던 열정 가득한 동호회원이었다. 가끔씩은 동문 선배들이 갑작스럽게 자취방으로 찾아와서 깡소주를 선물해주기도 했다. 그 해 가을에는 거의 한 달 동안 매일매일 술을 마셨던 인생 대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새내기 시절부터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혼란스럽고 방탕한 대학 시절이 이어졌다.
그러는 사이 나의 학점은 서서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1학년 1학기 때에는 B학점(3.0)을 턱걸이했지만, 그 후에는 꾸준히 2점대가 이어졌다. 입대하기 전에는 열심히 공부를 한다고 했지만 역학 과목의 기본이 부족했기에 C학점(2.0)까지 추락. 간단히 학사 경고를 면할 정도였다. 공부에 대한 자신감이 급격히 떨어졌다. 성적 추락으로 또다시 방황이 시작되었다. '내가 선택한 기계공학이 내 적성에 맞는 것일까?', '내가 진짜로 원하는 전공일까?', '잘할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이 이어졌다. 자취방 한 구석에 앉아서 소주 한 잔을 기울이면서 고민에 고민을 이어갔다. 늦은 사춘기가 온 기분이었다. 대학의 자유로움을 즐겼지만 내 삶에서 뭔가 소중한 것을 잃은 듯한 느낌. 내 삶의 나침반이 고장 난 기분이었다. 대학에 들어오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생활해 보니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나 자신이 인생이라는 숲의 입구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듯했다.
설상가상으로 내게 큰 힘이 되던 선배들과 친구들도 사라져 갔다. 함께 술잔을 기울이면서 고민을 나누던 친구들이 입대 영장을 건네주며 군대로 사라졌다. 2학년이 시작되면서은 하나둘씩 입대를 했고 2학년이 마무리될 즈음에는 동기들 자리를 새로운 복학생 선배들이 채웠다. 수업을 들어도 아는 얼굴보다는 모르는 얼굴들이 더 많은 정도였다. 나 또한 슬슬 입대를 준비할 시간이 온 듯했다. 이렇게 나태한 생활을 해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불안함이 밀려왔다. 군대에 가서 다시 한번 정신 무장을 하고 대학으로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와중에 친척 결혼식에서 공군 중사로 복무하는 사촌형을 만났다. 형님은 내게 공군에 입대를 권유했다. 복무 기간이 30개월로 육군보다는 4개월이 길지만 대부분이 도시 근처에 있고 6주에 한 번 2박 3일 외박을 나올 수 있다는 것이었다. 휴가를 자주 나올 수 있다는 말에 나는 공군 입대를 결정했다. 공군 기술병으로 지원을 하여 11월 수원 비행단에서 시험을 보게 되었다. 대망의 합격자 발표일,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수원에 있는 병무청을 찾았다. 다행히 합격이었다. 통지서를 보니 입대일은 1997년 5월 12일. 공군 사병 519기로 진주에 있는 훈련소로 입대하라는 것이었다. 내 삶의 또 다른 조각이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선택은 신의 한 수였다,
1997년 11월 IMF외환위기라는 거대한 폭풍이 다가오고 있었고 나는 그 기간 군복무를 하면서 새로운 기회를 준비할 수 있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