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에서의 다짐
대학생이 되면서 처음으로 취미라는 것이 생겼다. 틈틈이 시간이 날 때마다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는 것. 바로 여행이었다. 신문배달을 해서 처음으로 번 돈으로 여행안내 책자를 하나 샀고 그 책을 보면서 여행 계획을 세웠다. 그때부터 나는 세상 여정을 즐기는 여행가가 되었다. 혼자서도 좋았고, 친구들과 함께라면 더욱 좋았다.
나의 첫 여행은 95년 여름에 떠났던 제주도 여행. 대학교 첫 번째 방학 때 고등학교 친구 둘과 함께 제주도로 떠났다. 용돈이 부족했기에 목포까지는 야간 통일호 기차를 이용했고 목포에서는 제주까지는 비행기를 이용했다. 내 생애 처음으로 타보는 비행기였다. 제주도 일주를 하면서 우리는 진정한 젊음을 만끽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한라산 등산! 장마철이었지만 영실 계곡을 통해서 오르는 윗세오름은 등산이 가능했다. 윗세오름에 올랐지만 우리는 백록담에 오르고 싶었다. 1995년 당시 윗세오름에서 백록담으로 오르는 길은 남벽 등산로 붕괴로 통제된 상황(지금까지도 윗세오름에서 백록담으로 가는 등산로는 폐쇄된 상황)이었지만 우리는 젊은 객기로 통제된 등산로를 몰래 올라갔다. 결론은 무모한 도전의 확인이라고 할까? 붕괴된 남벽을 오르다가 비바람이 심해서 중간에 등산을 포기했고, 내려오는 길에 살짝 미끄러지면서 안경이 깨지고 옷이 찢어지는 사태가 벌어졌다. 비록 백록담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뭔가 오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하산을 하면서 나는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 '한라산을 시작으로 전국의 명산들을 올라야겠다'는 생각을.
결국 한라산에서 돌아온 후에 곧장 설악산 대청봉으로 향했다. 제주도 갔던 고등학교 친구와 함께였다. 우리의 젊은 열정이 가득했기에. 중간쯤 올랐을 때 하산하는 아주머니들의 한 마디 "바로 10분 앞에 예쁜 여학생들이 올라가던데 빨리 가면 만날 수 있을 거야"라는 말을 듣고 우리는 정말 열심히 산행을 이어갔다. 하지만 중청봉 대피소에 올랐을 때 비슷한 또래의 여학생들은 보이지 않았다는. 아주머니들의 착한(?) 거짓말 덕분에 대청봉 산행은 그리 힘이 들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설악산 이후부터 나는 아르바이트비를 받을 때마다 기차표를 끊어서 산으로 향했다. 겨울방학에서는 지리산 천왕봉과 치악산 비로봉, 오대산 노인봉과 구불구불 암벽이 이어지는 월악산에도 올랐다. 오대산 노인봉부터는 홀로 산행에 도전했다. 혼자 산에 오르면서 내 삶은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라산에서 다짐했던 국립공원 정상 정복을 위해서 청춘을 바쳐서 정말 열심히 산에 올랐다.
공군 입대 영장을 받은 후에는 몇 개 남지 않은 국립공원 산행을 준비했다. 영주 소백산과 영암의 월출산이었다. 천안에서 출발하여 히치하이킹 몇 번으로 조령산에 도착했다. 문경새재길을 걸어서 내려갔고 문경새재부터 영주까지는 버스를 이용했다. 그리고 소백산에 올랐다. 넓게 펼쳐진 소백산 비로봉의 등선길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소백산 등산을 마치고 안동과 포항, 부산으로 향했다. 중간중간 자동차가 잡히지 않을 때는 버스를 이용하긴 했지만 대부분은 히치하이킹을 했다. 97년 2월 당시에는 인심이 좋았던지 국도 중간중간에서 훈훈한 정을 만날 수 있었다. 영덕에서 포항으로 가는 길에 차를 태워주신 어떤 아주머니는 "나를 사위 삼고 싶다"며 여행 잘하라고 용돈을 1만 원을 건네주시기도 했다. 포항에서 부산 가는 길은 늦은 시각이었고 부산역 기차 출발이 밤 9시였기에 고속버스를 이용했다. 처음으로 부산이라는 곳에 방문하여 자갈치 시장에 들렀고 시원한 국밥 한 그릇으로 저녁을 때웠다. 부산역에서 목포로 향하는 야간 통일호를 타고 월출산으로 향했다. 마산과 진주, 보성을 지나서 나주로 오는 기차였다. 새벽 4시경에 나주역에 내려서 영산포 터미널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생애 처음으로 뼈해장국을 먹었다.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해장국은 처음이었다. 5천 원에 고기와 국밥을 먹을 수 있다니 놀라운 가성비였다. 그날 먹었던 돼지국밥과 뼈해장국 맛을 잊지 못해서 나는 지금도 우리나라 여기저기를 돌면서 국밥 여행을 다니고 있다.
영산포 터미널에서 첫차를 타고 처음으로 남도의 국립공원 월출산으로 향했다. 영암 읍내에서 걸어서 천황사로 향했고 그곳에서 정상을 거쳐서 도갑사 쪽으로 산행을 마쳤다. 월출산은 오르락내리락 재미있는 산이었고 암벽으로 가득한 산의 풍광이 설악산을 압도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월출산을 마지막으로 입대 전 산행을 마무리했다. 아직 북한산과 덕유산, 주왕산, 계룡산, 속리산이 남아있었지만 입대 전에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기에 국립공원 정복을 위한 산행을 잠시 접어야 했다. 어찌 되었건 그 당시의 도전 덕분에 나는 산을 좋아하는 산사나이가 되었고, 아직도 틈틈이 시간이 날 때마다 산을 찾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