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입학과 아르바이트
대학 새내기가 되면서 나는 홀로 자취를 했다. 단독 주택 안에 있는 외톨이 작은 방, 드라마 한 지붕 세 가족에서 순돌이 가족이 살았던 그런 집이었다. 작은 방 하나에 연탄 구멍이 있는 콘크리트식 부엌이 전부였고 화장실은 외부에 있는 재래식 화장실이었다. 세수나 세면은 콘크리트 부엌에서 대야에 물을 받아서 씻어야 했다. 넓지 않고 조금은 오래된 느낌이었지만 나만의 공간이 생겼다는 것이 너무나 행복했다. 처음으로 시골을 떠나서 도시에서 생활하는 것이 기뻤고, 학교까지 걸어서 15분 만에 갈 수 있다는 것도 좋았다. 하지만 이사를 마치고 홀로 남은 자취방에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앞으로 혼자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밥도 해야 했고 설거지도 빨래도 해야 했기에 고민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성인이 된 이상 매번 부모님께 용돈을 받는 것도 죄송했기에 빨리 아르바이트를 구해서 돈을 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첫 아르바이트는 신문배달이었다. 오리엔테이션에서 만났던 같은 과 동기의 제안으로 4월부터 시작한 신문배달. 매일 새벽 4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신문보급소에 도착하여 100부의 신문을 챙겼다. 그 신문 속에 광고지를 챙겨 넣으면 대략 5시 정도. 그리고 그 신문을 자전거에 싣고 담당하는 지역으로 향했다. 터미널 근처에 있는 아파트와 단독 주택 단지였다. 첫 주에는 한 집 한 집 배달장소를 익혔고 다음 주부터는 홀로 신문 배달을 시작했다. 쉬워 보일 것 같았던 일이었지만 실수가 이어졌다. 1~2주는 한두 집에 신문을 배달하지 못하기도 했고, 문 앞에 놓은 신문을 누군가 가져가기도 했으며, 신문이 비에 젖어서 읽지 못하기도 했다. 때론 구독을 끊은 것을 모르고 계속 배달을 하다가 강한 항의를 받기도 했다. 간혹 전날 음주로 인해 지각을 하여
신문배달이 늦어질 때도 항의 전화가 이어졌다.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욕도 먹었지만 그래도 꿋꿋이 버텨가며 신문배달을 이어갔다.
이윽고 기다리고 기다린 대망의 급여일. 설레는 마음으로 수당 봉투를 열어보았다. 금액은 17만 원. 솔직히 실망스러운 금액이었다. 장마철 큰 비를 맞아가며 소중한 새벽잠을 줄여가며 힘들고 지친, 아픈 몸을 이겨내며 땀 흘린 노동의 대가치고는 너무나 적은 금액이었다. 첫 월급치고는 정말 기대 이하였다. 결국 배달일은 석 달을 채우지 못하고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수입도 적은 것은 물론이고 게으른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자리였다.
신문 배달을 끝내고 여름방학에는 막노동에 도전을 했다. 5시 30분쯤에 인력 사무소에 나가서 일자리를 찾았다. 아직 젊은 학생이었기에 잡노동은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서너 명이 한 조가 되어서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가서 공사장으로 가서 하루 종일 막노동을 했다. 벽돌을 나르고 철근을 나르고 건설 폐기물을 치우고 먼지 속에서 시멘트 바닥을 청소하는 일이 내 몫이었다. 막노동도 만만할 듯했지만 결국에는 체력이 문제였다. 요령도 없었기에 힘이 더 들었고 몸도 금방 지쳐갔다. 종일 거친 일을 해도 받는 돈은 5만 원. 여기서 수수료를 떼면 4만 원이 조금 넘는 돈을 받을 수 있었다. 신문배달보다는 많은 돈을 벌었지만 역시나 큰돈은 아니었다.
막노동과 함께 나는 전단지 배포일도 했다. 친구가 소개해준 학원에 들려서 홍보 전단지를 받고 이것을 가지고 아파트 단지나 중학교, 고등학교 주변에서 몇 시간씩 전단지를 나눠졌다. 막노동보다는 일의 강도가 높지는 않았지만 비정규적으로 있는 일이라서 돈벌이는 크게 되지 않았다. 가끔씩 어린 학생들이 무시하는 표정으로 지나갈 때는 대학생인 나의 자존심이 꽤 상하는 경우가 있었다. 돈을 번다는 것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여름방학 끝나고 새로운 학기가 시작하면서 새로운 알바를 시작하게 되었다. 서서히 94학번 선배들이 군대를 가기 시작하면서 본인들이 하고 있던 과외를 내게 소개해준 것이었다. 일주일에 3번 정도 수업을 하고 30만 원 정도의 수입이 생기는 꽤 괜찮은 알바였다. 그때부터 나는 수학 과외를 하면서 틈틈이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찾아 나섰다. 시간이 많은 방학에는 데이터 입력 보조원에서 카드체크기 영업사원, 편의점 판매원, 의류매장 물품운송 등 다양한 일자리를 찾아나섰다. 역시나 결코 쉽지 않은 일들이었다. 그렇지만 아르바이트 경험으로 나는 한층 더 많은 세상을 볼 수 있었다. 그 때부터 나는 깨달았다. 세상사는 것은 만만치 않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