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화산, 신비의 루아페후 앞에 서다
루아페후 화산
12월 27일 북섬에서의 첫날이 밝았다.
어젯밤은 회사에서 걸려온 몇 통의 전화 때문에 쉽지 잠을 이루지 못한 하루였다.
1월 복직을 하면 새롭게 만들어진 신규팀에서 일을 하게 된다는 새 팀장의 전화와 갑자기 내가 생각나서 전화를 했다는 나의 오래전 나의 팀장의 전화가 우연처럼 이어서 걸려왔다. 몇 달간의 휴직과 제주도살이, 그리고 뉴질랜드 여행. 그리고 그것이 끝나고 나면, 또 새로운 팀에서의 새로운 시작. 어쩌면 나에게 너무나 익숙한 일들이다. 새로운 사업, 새로운 전략. 이런 것이 내 운명이고 팔자라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그런 쓸데없이 잡다한 생각 때문인지 오늘은 아침 일찍 잠에서 꺠어났다. 덕분에 오늘 아침은 오랜만에 해변가 산책을 나섰다. 웰링턴의 아침 바람은 여름이었지만, 살짝 차가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아침부터 비치에서 바다 수영을 하는 사람들이 몇몇 보였다. 나는 홀로 웰링턴의 남쪽 오리엔탈 베이를 걷고 또 걸었다. 1시간 정도 비치 산책을 마치고 다시 숙소로 돌아와서 간단히 조식을 먹고 다시 북쪽으로 올라갔다.
오전 10시 체크 아웃을 하고 웰링턴에서 1번 고속도로를 타고 북쪽으로 향했다. 남섬과는 다르게 웰링턴을 빠져나가는 도로는 왕복 4차선, 혹은 6차선의 자동차 전용도로였다. 중간 분리대가 있었고 차량들도 시속 100km 이상으로 달리고 있었다. 남섬에서는 항상 2차선 도로만 다녔는데, 이런 대도시의 간선도로를 달리자니 뭔가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뉴질랜드에서 처음으로 교통 정체를 만나기도 했다. 병목 구간과 도시 진입 구간에서는 어김없이 차들이 막혔고, 몇 분에서 길게는 30여분까지 정체 구간이 이어지기도 했다.
웰링턴을 출발해서 마톤(Marton)과 타이하페(Taihape) 등의 중간 도시 등을 거쳐서 와이우루(Waiouru)까지 약 270km를 달렸다. 3시간 정도면 충분한 거리였지만 연휴에 따른 교통 체증으로 오후 2시가 넘어서 도착할 수 있었다. 4시간 이상이 걸린 것이었다. 오늘 숙소인 와이우루의 작은 모텔에 짐을 풀었다. 여기에 짐을 풀고 오늘은 뉴질랜드 북섬에서 가장 높은 산인 루아페후산(mt. Ruapehu)에 방문할 예정이었다. 루아페후 산은 3개의 봉우리가 있고, 그중 하나인 타후랑기 봉은 2,797m로 북섬 최고봉이다. 루아페후라는 산 이름은 마오리어로 폭발하는 구멍이라는 뜻으로, 현재도 이 산은 화산 활동이 진행되고 있는 활화산이었다.
숙소에 도착해서 늦은 점심으로 파스타를 요리해서 먹고 다시 차에 올라서 루아페후 산이 있는 서쪽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1953년 철도 사고에 대한 추모 장소가 있었다. 1953년 크리스마스에 이브에 285명을 태우고 웰링턴에서 오클랜드로 향하는 기차가 이곳을 지나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그 시점에 화산활동으로 인해 산 정상에 있는 화구호를 막고 있던 빙하가 녹으면서 산 정상에 있던 물 20억 리터와 물, 빙하, 그리고 화산진흙(라하르)이 한 번에 쏟아졌고 산 밑에 있는 다리를 무너뜨리고 말았다. 이를 발견한 한 운전자가 기차가 오는 것을 보고 손전등을 흔들며 기차를 세웠지만, 전체 객차 중 절반 이상이 강에 빠지고 151명이 사망하게 된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이런 사고를 추모하기 위해 추모 공간이 만들어져 있었다. 우리 가족은 사진 한 장, 한 장을 살피며 아픈 비극의 현장을 하나하나 찾아봤다.
새롭게 만들어진 철교탕이와이 철도 참사 현장을 둘러보고 다시 고속도로를 달렸다. 오하쿠네(Ohakune)라는 작은 관광 도시를 떠나서 2차로의 산악 도로를 달렸다. 이 길은 루아페후산에 있는 스키장으로 가는 길이었다. 가는 길은 제주도의 사려니 숲길처럼 울창한 나무들이 양쪽으로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 화산 숲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굽이굽이 산을 오르니 가는 길에 망가웨루 폭포가 있어서 잠시 차를 세우고 경치를 구경했다. 흐르는 물의 양이 적어서 그런지 폭포수는 잔잔하게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약 5km 정도를 더 달려서 투로아(Turoa)라는 스키장 입구에 도착했다. 현재는 여름철이라서 스키장 영업을 하지 않는 상태였다. 때문에 우리 가족을 제외하고는 사람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이 스키장의 고도는 1,623m. 리프트를 타고 오르면 2,300미터까지 오를 수 있어서 겨울철에는 스키를 즐기는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었다.
망가웨루 폭포
스키장에서 바라본 정상스키장에서 산의 정상부를 바라보았다. 약 1000m 더 올라가야 하는 산의 정상부. 하지만 올해 여름 약간의 화산활동 징후가 보이면서 화산활동 2단계를 발효되었고, 정상 등산은 사실상 어려운 상태였다. 정상부 안쪽에는 크레이터 호수가 있다. 루아페후의 활동적인 크레이터는 정상 고원의 남쪽 끝에 위치해 있으며,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따뜻하고 산성 물질로 가득 차 있다고 했다. 화산활동이 있을 때마다 이곳의 진흙 같은 라하르가 흘러내렸고, 산 아래를 파괴시켰다. 이런 분출을 막기 위해서 유출구 전체에 테프라 댐이 여러 차례 건설되었으며, 가장 최근에는 1945년과 1996년에 건설되었다. 이 댐들은 1953년과 2007년에 각각 붕괴되었고, 매번 크레이터 호수의 폭발을 일으켰고, 이로 인해 파괴적인 라하르가 강 아래로 내려왔다. 이 산은 여전히 위험한 활화산이었다. 잠시 뒤를 돌아서 주변 풍경을 살폈다. 스키장 인근에는 화산 활동으로 만들어진 돌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라하르 활동으로 인해 만들어진 진흙 덩이들이 중간중간에 보였다. 한라산 백록담 인근에서 보았던 그런 풍경이었지만, 이 루아페후 산에는 만년설이 있었기에 한라산과는 조금은 달랐다. 그리고 저 멀리 서쪽 해안 근처의 타라나키(mt. taranaki) 산도 희미하게 보였다. 뉴질랜드의 남쪽과 서쪽 평원 지대가 그대로 눈앞에 펼쳐졌다. 신비스러운 풍경이었다.
저 멀리 보이는 타라나키 산
뉴질랜드의 남쪽 평원 스키장에서 잠시 내려오니 공원 트래킹 코스의 시작점이 있었다. 짧게는 1시간 30분에서 길게는 9시간까지 산 주위를 걷는 트래킹 코스들이었다. 아이가 없다면 한 번 도전해보고 싶었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나중에 다시 시간이 나서 이곳을 찾는다면 아내와 함께 도전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트래킹에 대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날이 어둡기 전에 다시 산 아래로 차를 몰았다.
루아페후산 트래킹 로드 (중간중간 막대가 보인다)오는 길에는 키위를 조심하라는 표지판도 있었다. 야행성이 키위새가 이곳에 서식하는 듯했다. 꼭 한 번 보고 싶지만 아직까지 뉴질랜드 여행하면서 만난 적은 없었다. 다시 40여분을 달려서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은 양들의 천국이었다. 그림 같은 초원에서 풀을 뜯는 양들이 가득한 풍경을 끝으로 루아페후 산과 아쉬운 작별 인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