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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국 보러 혼인지. 종달리 수국길도 유명

by 만년소녀
산책길.jpg 동네 산책길에도 수국이 예쁘게 피어있었다.


제주에 여름이 온다는 건, 수국이 꽃망울을 터뜨릴 준비를 한다는 뜻이다. 제주 집 근처 골목길에도 초여름부터 수국이 피기 시작했다. 반려견 보리와 산책을 나서면, 어느새 수국들이 가득한 담벼락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게 된다. 푸른빛 수국, 자줏빛 수국, 은은한 핑크까지. 그 색의 비밀이 흙에 있다는 건 알지만, 어느 순간부턴가 그냥 "예쁘다"는 말만 입에서 나온다.


제주의 수국 명소라고 하면 관광객들은 주로 카페나 수목원을 떠올리지만, 진짜 ‘찐’ 도민들이 추천하는 장소는 따로 있다. 서귀포 성산읍의 혼인지.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다. 고요한 연못과 오래된 신화가 함께 숨 쉬는 이곳은, 사실 수국 명소라는 사실조차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그래서 더 좋다. 붐비지 않고, 조용히 걸으며 수국과 바람을 벗 삼기 딱 좋은 곳.


입장료? 없다. 다만 입장하면 마음이 열리는 곳이다. 제주 올레길 2코스 안에 있어 걷기 여행 중 들르기에도 그만이다. 연못을 한 바퀴 돌다 보면, ‘이곳에서 전통 혼례를 치른다’는 잔디광장도 나온다. 전통혼례관 앞에서 한복 입은 커플이 사진을 찍는 모습도 종종 눈에 띈다. 아마 그들에게 혼인지는 그냥 관광지가 아니라, ‘기억이 새겨진 공간’일 것이다.


혼인지는 이름 그대로 제주 혼인신화가 전해지는 연못이다. 옛날 옛적, 고을나·양을나·부을나 세 신인이 벽랑국에서 온 세 공주를 아내로 맞았고, 이곳에서 혼례를 올렸다고 한다. 이들이 활을 쏘아 각각 꽂힌 땅이 지금의 제주시 일도, 이도, 삼도동이라니… 수국을 보다 문득 전설에 잠기게 되는 마법 같은 곳이다.


물론, 혼인지 말고도 수국을 볼 만한 곳은 많다. 서귀포의 카멜리아 힐에서는 여름이면 수국축제를 연다. 겨울에는 동백꽃으로 유명하지만, 6만 평의 대지 위엔 사계절 꽃이 흐드러지게 핀다. 제주시 구좌읍의 종달리 수국길도 아름답다. 바다 옆 도로를 달리며 창밖으로 펼쳐지는 수국의 행렬은 그야말로 '달리는 힐링' 그 자체다.


하지만 수국은 꼭 유명한 곳에서만 봐야 예쁜 건 아니다. 보리와 함께 걷던 우리 동네 길모퉁이에도, 작고 조용한 수국의 세계가 있다. 여행은 꼭 멀리 가야만 의미 있는 게 아니다. 그저, 매일 걷는 길에 문득 피어난 수국 한 송이가 마음을 물들일 수 있다면, 그게 진짜 제주 여름의 시작 아닐까.

월드컵공원 수국.jpg 제주월드컵경기장에 피어있던 수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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