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기록 #4
그곳에 도착했다.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곳이야 말로 지상천국이구나!"
내 입은 떡 벌어진 채 한동안 다물어질 생각이 없었다.
2021년 5월, 우리는 캠핑카를 구입했다. 캐나다에 산다면, 아름다운 자연을 가득 품고 있는 이곳에서 산다면, 다른 것은 포기하더라도 꼭 갖춰야 하는 필수품 같았다. 재정이 넉넉해서 고려한 것은 아니었다. 가지고 있는 차가 다 중고지만, 그중 그나마 값을 좀 받을 수 있는 것을 하나 팔아 그 가격에 상응하는 차를 구입한 것이었다.
1999년식 포드(Ford). 20년 가까이 SPARC BC 장애인 센터에서 사용된 휠체어 셔틀벤이었다. 우리가 구입할 당시 12만 km 정도 주행한 상태였는데,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보통 한번 차를 사면 30만 km 까지 탄다고 생각하는 캐나다 사람들의 인식으로는 앞으로도 한참을 더 탈 수 있는 차였다. 25년 된 차가 아직도 멀쩡하게 굴러간다니. 예전에 만들어진 차들은 구조가 단순해서 잔고장이 없고 튼튼하다는 남편의 말에 신빙선을 더해주는 모습이었다.
우리 둘 중 누군가가 손재주가 있어서 처음부터 다 뜯어내야 하는 차를 산건 아니었다. 비빌 구석이 있었다.
아버님.
손이 닿는 곳마다 마법이 일어나는 분.
무엇을 만들 때 치수도 필요 없다. 대충 보시고 이 정도면 되겠네 하시면 그게 맞다. 쓱싹 자르고 뚝딱 박으면 어떤 것이든 만들어진다. 아버님에게 필요한 건 오로지 유튜브와 재료! DIY로 캠퍼카를 만든 여러 사람들의 영상을 참고해 페인트, 단열, 전기배선, 나무작업까지 그 모든 작업을 혼자 해내셨다. 우리는 구도와 디자인, 재료 구입, 그리고 도움이 될만한 영상을 공유해 드린 것이 다였다. 그렇게 8개월에 걸쳐 캠핑카가 완성되었다.
아이가 생기기 전, 우리는 주말마다 반려견과 함께 등산하는 것을 좋아했었다. 그러나 우리보다 1년 전 아이가 태어난 남편의 친구 (남편의 등산 메이트) 말을 들으니 평지 수준의 아주 쉬운 등산 코스를 2살 된 아이와 가보려고 시도했다가 300m도 못 가고 꼼짝없이 집으로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2시간 넘게 차 타고 찾아간 곳이랬는데.... 그곳에 가기 전 준비 과정, 도착해서의 모든 상황이 어땠을지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촤-악 펼쳐지면서 ‘아, 나는 쓸데없는 고집부리지 말고 지혜롭게, 마음의 시험 없이 살리라’ 생각했다.
친구의 경험으로 비춰보아 당분간은, 아니 어쩌면 오래도록 미뤄야 할 활동이었다. 남편과 나는 둘 다 내향적이지만 또 집에만 있는 사람들은 아니다 보니 등산을 대체할 무언가, 그러면서도 꾸준히 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캠핑이었다.
그러나 우리만 캠핑을 할까? 숲 속에서 텐트를 치고, 밥 지어먹고, 간이 화장실에서 스쿼트 자세로 볼 일을 보고, 크고 작은 벌레와 싸우는 것은 분명 고생스러운 일이지만, 캠핑을 해야만 느낄 수 있는 쉼, 자유, 치유, 그리고 자연의 매력에 푹 빠져 여름이 되면 다들 캠핑장으로 우르르 몰려든다. 그러니 예상대로 예약 전쟁! 대학 수강 신청부터 콘서트 예약까지 제일 싫어했던 그 광클을 또 하고 있는 나 자신과 다시 마주하고 있다.
캠핑을 하면서 맛있는 것도 먹고 자연의 청량함을 즐기는 것, 너무 좋지만, 가장 큰 장점은 세상의 소리와 잠시 멀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인터넷 ZERO ZONE. 핸드폰을 보면서 빠르게 흡입했던 끼니도 여기서는 재료가 살아있는 음식이 되어 그 식감과 맛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지고, 화면을 더 자주 보던 나의 시선이 아이에게 고정되어 있으니 아이는 더 이상 놀아달라고 조르지 않는다. 밀착된 공간에서 가까이 느껴보는 아이의 숨결은 더 따뜻하고 진하게 다가온다.
아이에게 크게 바라는 것은 없다. 그저 자연과 가까이 벗하며 자라는 것. 어려서 자연을 많이 접한 아이가 유행(流行)에 민감하지 않는다는 문구를 본 적이 있다. 각자의 모습에 불만 없이 그 고유의 아름다움을 보존하며, 질 때와 필 때는 아는 자연. 그런 자연의 모습을 닮은, 유연하고 겉치레 없는 삶을 살아가길 바란다.
때마침 핸드폰에 담아 온 아이의 동요가 흘러나온다.
하늘은 유난히 맑고
바람도 잔잔한 날에
아빠와 함께 거닐던 그 조용한 바닷가
아빠는 날 보며 말했지
바다처럼 넓게 크라고
아무리 힘든 일이 라도 참고 이겨내라고
아빠 그때는 그 말 뜻이 무엇인지 몰랐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 마음을 알 것 같아요
여전히 그 마음을 다 안다 고백할 수 없으니 나에게 ‘하지만 지금‘의 순간은 아직 찾아오지 않은 듯하다. 그러니 내 아이에게 “너는 나보다 더 빨리 철이 들고, 나보다 더 잘 참고, 더 나은 삶을 살아라“ 하지 않을 것이다.
부모인 우리가 부재하게 될 그 어느 날, 견디기 힘든 버거운 일상에 손 내밀어줄 이 없는 그 절박한 어느 날, 오늘처럼 다시 자연의 품을 찾아 위로받을 수 있기를.
그리고 또다시 용기 내어 살아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