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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t a Fan Sep 07. 2024

받아들임

엄마의 기록 #6

어린이집 선생님께 연락이 왔다. 내 아이가 같은 반 친구들을 때린다는 것이었다. 자기의 것이라 생각되는 것을 나누는데 아직 어려움이 있어 보였다. 어린이집을 처음 시작했을 때도 비슷한 문제가 있었다. 자신은 한국말로 "같이 놀자", "이것 좀 봐" 하며 표현하는데 친구들의 반응이 없으니 관심을 끌기 위해 옷을 잡거나 꼬집었던 것이다. 다행히 그 행동은 영어가 늘면서 좋아졌다. 그러나 때리는 것은 다른 결의 문제처럼 보였다. 선생님께서는 집에서 내가 아이를 어떻게 지도하고 있는지 알려준다면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말씀해 주셨다.


나의 지도라.


집엔 또래가 없으니 내가 아무리 지도해도 어린이집 상황에 적용되기 어렵지 않을까 잠시 생각했지만, 이미 그 대상이 내가 되든 아이 스스로가 되든 때리고 악을 쓰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결혼 전, 출산 전에는 내가 엄마가 된다면 아이에게 오히려 너무 엄할까봐 걱정했었다. 그러나 막상 낳고 보니 아이가 한없이 예뻐서의 이유가 아닌, 내가 자라면서 경험한 결핍을 내 아이가 느끼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대로 육아의 방향이 결정되고 있음을 보게 되었고, 그 두드러진 특징은 ‘감정의 수용’에 관한 것이었다.


내 어릴 적을 돌아보면, 나는 부모님이 처한 환경 안에서 정말 최선을 다해 나를 키워주셨다 생각하고 그 노력과 사랑을 인정한다. 그러나 한 가지, 나의 감정과 의견을 충분히 공감하고 배려해주셨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나의 솔직한 감정을 표현하면 돌아오는 반응은 “아니 너는 왜 그러냐?"이었던 기억과, 모두가 "예" 하는 상황에 "아니오" 하며 나의 의견을 피력하면 '까다로운' 아이가 되었던 날들. 그리고 그런 나의 모습에 지쳤던 아빠가 어느 날 매를 들고 나를 때린 순간, 그 모든 장면들이 나에게 쿵하며 내려앉아 내 마음속 부정적인 자아상을 콕 심어주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참았다. 솔직하게 말하고 싶어도 내 생각이 틀렸겠지 싶어 입을 닫았다. 나는 싫어도 다들 한다고 하면 애써 웃으며 대세를 따랐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살기 위해' 나의 생각과 의견을 다시 표현하기 시작했지만, 겉으로는 쿨한 척, 자기 신념이 확고한 사람인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사람들이 '쟤 왜 저러나' 생각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렇게 내 눈치 남 눈치 잔뜩 보며 살아가는데, 아이라는 내 삶의 가장 큰 적수를 만나게 되었다. 내 생각과 의견이 그 어느 틈으로도 통과되지 않는 대상. 내가 이해받기보다 이해해줘야 하는 입장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내가 원했던 것처럼 아이의 감정과 의견을 먼저 수용해주려 노력했다. 그러나 아이에게는 조절능력이 없음을 알면서도, 나에게 막무가내로 감정을 쏟아낼 때면 화, 아니 분노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나의 내면의 결핍이 더 깊이 파고들어 내 마음을 뒤틀었고, 아이에게 나의 괴로움을 여과 없이 쏟아냈다. 그렇게 지키고 싶었던 공든 탑을 내 손으로 자주 무너뜨렸다.


처음에는 이 분노가 어디서 오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나는 그냥 이렇게 못난 사람이구나 생각했고, 크게 자책했다. 우울증의 상태까지 도달했던 나는 개인 상담, 부모 상담을 통해 이것이 ‘아이가 내 어릴 적과 같은 경험을 하면 어떡하지?’ 하는 지나친 불안에서 기인한 맹목적인 수용의 부작용임을 알게 되었다. 아이의 감정과 생각의 수용 그리고 상황에 맞는 적절한 제한과 지도도 중요하지만, 엄마도 감정이 있는 존재임을, 다양한 감정이 있지만, 그것을 건강하게 표현할 줄 아는 사람임을 먼저 본으로 보여줘야 했다. 그러나 오랜 시간 형성된 슬픈 기억, 결핍, 그로 인한 미성숙함이 존재하기에, 각고의 노력 없이는 변화와 기적이 있을 수 없음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사실 이 깨달음의 시작에 나는 부모를 원망했었다. 그때 나를 ‘그렇게‘ 대했더라면 지금의 나는 심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되었을 텐데. '내 생각은 잘못되었고 나는 까다로운 사람이야' 하며 자책하지 않고, '나의 생각과 원하는 조건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를 수 있지' 하며 인정해 주고, 나의 주장이 그저 쓸데없는 고집이라면 보완해나가려 노력했을텐데. 그러나 지금은 조금이나마 이해한다. 아이라는 적나라한 거울을 통해 나 자신의 민낯을 바라보며, 그래, 엄마 아빠도 나 같은 딸, 아니 그냥 자식을 키운다는게 쉽지 않았겠다, 짐작해 본다.


오늘도 아이와의 일상은 반복된다. 어느 날은 평온하고 어느 날은 전쟁이다. 어린이집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느 날은 칭찬을 듣고 어느 날은 문제를 일으킨다. 여전히 결심한 만큼 아이를 대하지 못할 때 좌절하지만, 이 모든 순간들이 나와 아이가 함께 성장하는 과정이라 여기며 조금은 넓은 아량으로 바라본다.


내 안의 결핍이 만들어낸 기준에 부합하는 아이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아이를 인정하고 존중해 주는 첫걸음은 먼저 나 자신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임을 지금이라도 알게 되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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