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기록 #7
나는 내 아이의 머리카락이 참 좋았다. 태어날 때 이미 머리가 풍성했던 편이라 신생아였을 때부터 배냇머리를 쓸어내리며 육아의 고됨을 잊을 수 있었다.
머리카락이 점점 자라면서 그 끝자락이 마치 파마를 한 것처럼 꼬부라지기 시작했고, 색은 밝은 갈색으로 변해갔다. 주위 사람들은 캐나다에서 태어나 그런가 외국 아이 같다며 농담을 건넸다.
나는 임신 기간 동안 성별에 대해 크게 관심은 없었다. 아무리 건강하게 살려고 노력해도 환경적 오염, 유전자의 변이, 혹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아이가 잘못될 수 있기 때문에 그저 건강하게 태어나기만을 바랐다. 20주가 되어 아들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안도했다. 그냥 처음 든 생각은, 내 성격이 아들이랑 더 잘 맞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당시 주위에서 많은 아가들이 태어나고 있었는데, 내 아이는 아들이니까 귀에 거슬리는 그 ‘평(評)’을 피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사촌언니의 아이가 태어났을 때 ‘예쁜’ 언니를 닮지 않고 형부를 닮았다며, 여자 아이인데 예쁘지 않다는 말을 ”너는 배만 빌려줬구나” 라고 사람들은 돌려 표현했다. 다른 언니는 스스로 아이의 외모를 비하하듯 ”나중에 필요하면 성형시켜 주면 돼, 괜찮아“ 라고 말하며 아이의 동의 없이 미래의 수술을 예약해 버렸다. 그렇게 소중한 아가들은 성별이 여자라는 이유로 태어날 때부터 외모로 평가받는 분위기였다. 엄마들도 ‘귀엽다’는 말에는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 말이 누군가에게는 시시콜콜한 혹은 진심이 조금 담긴 농담일지 몰라도 나는 그 소리가 참 듣기 싫었다. 어쩌면 질렸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외국이라고 외모를 안 따지는 것은 아니다. 크게 나눠 백인들에게는 아이의 머리 색과 눈동자 색이 중요하고, 흑인들에게는 피부색의 검고 밝은 정도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한 사람을 바라보는 전체적인 가치에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타향살이를 통해 이제야 그 외모 지상주의적인 사고로부터 자유로워지나 했는데, 아이의 탄생으로 다시 묶이는 기분이 들어 불편했다.
양가 부모님들은 임신 소식에 기뻐하셨지만, 성별 소식에는 아쉬움을 감추실 수 없으셨다. 우리 엄마 아빠는 딸 둘을 키워서 그런 게 없을 줄 알았는데 언니가 아들을 낳았으니 나는 딸을 낳았으면, 한 마디로 이미 손자가 있으니 손녀가 있어보고 싶다는 마음이셨고, 시댁의 사정은 좀 달랐다.
오 형제로 자라신 아버님은 결혼을 하신 후 딸을 갖기 원하셨다. 그러나 내 남편이 태어났고 둘째는 갖지 않기로 하셨다가 혹시 딸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으로 가졌지만, 역시나 아들이었다. 아버님의 형제들도 다 줄줄이 아들. 한마디로 딸이 귀한 집안이었다. 그래서 아버님은 우리를 통해 그 간절한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기대하셨지만, 또 아들이었던 것이다. 우리에게 압박을 주시거나 아쉬운 표현을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우리 아들은 어른들의 소원이 반영되어 어릴 때부터 삔도 꼽고 머리가 양갈래로 묶이며 자랐다.
2년 반 동안 내가 원하는 긴 머리를 고집했지만, 이젠 때가 되었음을 직감했다. 여자/남자아이 구별 없이 물려받은 옷과 긴 머리 덕분에 내 아이가 여아인지 남아인지 헷갈려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러나 그게 나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았다. 찰랑거리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이 나에게는 일상의 작은 힐링이었기에, 아이만 괜찮다면 머리에 바리깡을 대는 것은 최대한 뒤로 미루고 싶었다.
그러나 가족 여행이 하와이로 결정되면서 마음의 결심이 섰다. 더운 날씨에 긴 머리로 아이를 고생시킬 수 없었다. 미용실을 찾아갔다. 싹둑싹둑, 지이잉 하는 소리 뒤로 아이의 머리카락이 툭하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가였던 내 아이가 어린이가 되는 순간이었다.
머리를 멀끔하게 깎은 아이의 모습에 남편은 자신이 다 시원하다며 좋아했지만, 나는 왠지 허전했다. 훌쩍 커버린 듯한 아이의 모습이 왠지 낯설기도 했고, 이렇게 아이가 내 품에서 한 걸음씩 멀어지는구나 싶었다.
저녁이 되어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었다.
아이에게 물었다.
“엄마가 이야기 들려줄까, 자장가 들려줄까?”
“엄마, 머리 쓰담쓰담해 줘.”
그 말에 마음 속 나의 아기를 보낸 아쉬움이 달래진다.